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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고 31회 동기회

경남고등학교 제31회 동기회

덕수궁의 재발견

2007.11.20 20:49

고박 조회 수:318

덕수궁(德壽宮)


조선시대의 궁궐로서 경운궁으로 불리다가, 고종황제가 1907년 왕위를 순종황제에게 물려준 뒤에 이곳에서 계속 머물게 되면서 고종황제의 장수를 빈다는 뜻의 덕수궁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덕수궁 자리에는 조선 9대 임금인 성종의 형 월산대군의 집이 있었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한양으로 돌아온 선조는 궁궐이 모두 불에 타고 없어서 임시로 월산대군의 집을 거처로 정하고 선조 26년(1593)부터 궁으로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근처의 계림군과 심의겸의 집 또한 궁으로 포함하였다. 선조의 뒤를 이은 광해군은 즉위 3년(1611)에 이곳을 경운궁으로 고쳐 부르고 1615년 창경궁으로 옮길 때까지 왕궁으로 사용하였다. 그후 선조의 왕비인 인목대비가 경운궁으로 쫓겨나와 있게 되었는데 그 후로 광해군은 이 곳을 서궁으로 낮추어 부르게 하였다.

광해군이 인조반정으로 1623년에 물러나면서 인조는 즉조당과 석어당만을 남기고 나머지 건물들을 옛 주인에게 돌려주거나 없애버렸다. 그 뒤로 고종황제가 러시아공관에서 옮겨오면서 다시 왕궁으로 사용되었는데, 그 때부터 이 궁은 비로소 궁궐다운 건물들을 갖추게 되었다.

1904년의 큰 불로 대부분의 건물들이 불에 타 없어지자 서양식 건물인 석조전들이 지어지면서, 원래 궁궐 공간의 조화를 잃어버리게 되었다. 그 중 가장 큰 변화는 정문이 바뀐 것이다. 덕수궁의 정문은 남쪽에 있던 인화문이었는데, 다시 지으면서 동쪽에 있던 대안문을 수리하고 이름도 대한문으로 고쳐 정문으로 삼았다.

비록 조선 후기에 궁궐로 갖추어진 곳이지만, 구한말의 역사적 현장이었으며 전통목조건축과 서양식의 건축이 함께 남아있는 곳으로 조선왕조의 궁궐 가운데 특이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덕수궁 대한문 안에서 바라다본 바깥세상

 
대한문 밖에서 들여다본 덕수궁 안
이 문을 사이에 두고 그렇게 틀린 세상이 펼쳐 질 줄이야...

많은 연인들을 울고 웃게했을 덕수궁 돌담길의  덕수궁쪽 모습...
저 돌담에 얼킨 사연들 하나씩은 다 들 있제?



서양식 건물과 우리식 건물 사이에 펼쳐진 단풍들은 아마 이곳이 유일할듯...

 

임진왜란 이후에 그 아픔을 잊지말자고 계속 단청이 없는 상태로 유지되었다는 건물앞에서...

 
품계석들 (정 1품,종 1품,정 2품,종 2품,정 3품,정 4품...) 종 1품이 정 2품보다 더 높은 거더라 ㅎㅎㅎ

마누라와 함께 25년만에 다시 찾은 덕수궁...25년전의 우리모습이 바로 저 뒤에 ㅎㅎㅎ

 
젊은 연인들의 발랄한 모습이 부럽더라...
ㅎㅎㅎ



오랫만에 다시찾은 덕수궁의 가을...

새롭게 발견한 덕수궁이 안고있던 많은 슬픈 우리의 역사 탓인지
아니면 요즘 내마음 탓인지...

아름다움보단 쓸쓸함이 더 깊어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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