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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고 31회 동기회

경남고등학교 제31회 동기회

7일. 쿠차에서


- 쿠차의 아침... 현장도 이 길을 따라 와 머물렀다. 혜초도 이곳을 지났다. 아침, 시내의 분위기는 설렁했다. 박물관으로 가는 길, 시내는 바리케이드가 쳐져 있고, 경찰들이 지키고 있었다. 가이드는 경찰과 얘기를 한참 나누더니, 일정을 변경했다. 크제리아 (천산) 대협곡으로 버스를 돌렸다. 지도를 보니, 북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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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은 그 광대한 영토도 모자라서, 주변의 민족과 종교가 다른 나라들을 복속시키고, 통제했다.

소수민족에게 보내는 정부의 메세지는 개략 다음과 같다.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할 수 있다. 이슬람 사원에 가도 좋고, 자녀들에게 위구르 어를 가츠쳐도 좋다. 아랍어를 공부하고, 메카를 향해 하루 다섯번씩 절해도 좋다. 종족이 무엇이든, 도시에서 두명의 자녀를, 시골에서는 세명까지 둘 수 있다. 자치권이 적다고, 사는 지역에 중국인들이 점점 늘어난다고 불평하지 마라. 무엇보다 독립은 꿈도 꾸지 마라. 신 중국에 충성하라!”


이에 반발해서, 몇년전 우루무치에서 폭동 혹은 ‘독립운동’이 있었다. 우리의 3.1운동같은 것이었을 것이다. 중국은 유혈로 진압했고, 수백명이 죽었다고 한다. 그날이, 공교롭게도, 오늘 7월 5일이다.

중국당국이 바짝 긴장한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투르판공항 폐쇄 소동도 그 일환이었을 것이다. 도로 곳곳에 무장 경찰, 군인들이 검문 중이다.


우리 신문 한켠에는 이런 기사가 떴다. 


200명 가까이 숨졌던 우루무치 유혈사태 4주년이 이틀 앞으로 다가온 가운데 최근 신장(新疆)위구르자치구에서 테러사건이 잇따르자 중국 당국이 강력한 경계태세에 들어갔다. 3일 홍콩 명보(明報)에 따르면 최근 성도 우루무치를 비롯한 신장자치구 대부분 지역의 안보 경보등급이 유혈 사태후 최고 수준으로 조정돼 사실상 준계엄 상태에 들어갔다.  우루무치 거리 곳곳에는 중화기를 갖춘 무장경찰이 대거 배치됐고, 총기류, 탄약, 뇌관, 도화선, 도검류 등 위험물을 수거하고 테러 선동 내용이 담긴 서적, DVD 등 선전물을 압수하려는 검문검색도 이뤄지고 있다. 공안 당국은 테러 단체에 대한 중요 정보를 제공할 경우 최고 10만 위안(한화 1800만 원)의 포상금을 내걸었다.

이에 앞서 중국군 산하 인민무장경찰부대(CAPF) 소속 탱크와 군용 차량, 무장병력들이 우루무치 시내에서 훈련하는 등 시위조기 진압 의지를 과시했다. 


거리는 한산하고, 상가들은 거의 문을 닫았다. 오후라고 나아지지는 않을 것이다. 시내가 흐르는 곳에 버스가 잠시 섰다. 천산에서 내려오는 물에 손을 담가 보았다. 섞인 붉은 물...색깔은 흐리다.


국제 전화로 시골 어머님께 전화를 드렸다. 와이파이가 며칠 잡히지 않아, 스카이프가 안되었던 터였다. “잘 있어요, 엄마. 현장 삼장법사가 지난 곳을 답사하고 있어요... 가도 가도 사막이에요... 곧 돌아가요...”


- 천산대협곡이라 부르는 곳, 이곳 이름으로는 크제리아 대협곡으로 되어 있다. 기암괴석과 붉은 바위, 봉수대가 높고, 산 사이로, 깊이 파진 길 하나가 신기하게 나 있다. 한 줄기, 물이 맑게 흐르고 있었다. 병에 물을 떠서, 한 모금 마셔보았다. 달고 시원했다. 사막의 떫고 짠 물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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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의 물은 우리가 천산대협곡에서 채취(?)한 암영처럼, 대체로 너무 짜거나, 떫다. “차를 끓여 마시거나, 볶은 기장으로 슬러시로, 미숫가루처럼 마셨다.”고 하는데...


한참을 들어가니, 석굴 안내판이 있는데, 길을 막아놓았다. 누군가가 “닫아놓기 잘 했네!” 해서 다들 웃었다. 석굴을 볼 만큼 본 모양이다. 바위 한쪽에 소금 층이 보였다. 맛을 보니, 역시 소금이었다. 긁어 한 줌을 종이컵에 담았다. 2-3 킬로를 가니, 길이 막혀 있고, 蓋世谷이란 이름과 猴王出世라는 글자가 돌에 크게 새겨져 있다. 여기 들어서면 “세상 일은 덮고, 잊게 되는가?” 그런데 거기 “원숭이 왕이 출세했다?”는 또 무엇인가.


*원숭이는 ‘덜 진화한 인간’을 가리킨다. 손오공이 바로 그 ‘인물’을 상징하고 있다. 꽤는 많고, 잘난척이지만, 그러나 자기 대롱에 갇혀 있다. 앞에서 <반야심경>을 기억할 것이다. 그는 결국 ‘부처님 손바닥’을 벗어나지 못한다.

朝三暮四라는 장자의 우화를 기억할 것이다. “아침에 세 개, 저녁에 네 개”를 주겠다고 했더니 다들 꽥꽥 화를 내다가, 순서를 바꾸니 다들 환호했다는... 그 어리석은 원숭이들은 기실, 놀라지 마시라, ‘인간의 어리석음’을 일깨우고 있다.

그 중에서도 ‘왕’의 관을 썼으니, 자부심과 고집이 하늘을 찔렀을 것이다. <중용>에 이런 수수께끼같은 말이 있다. “다들 똑똑하다 생각하지만, 함정에 빠지는 줄을 모른다.”

그 ‘대롱’과 ‘색안경’을 깨달은 자가, 이 ‘좁은 세상을 出世, 나설 것이다.’ 그 보이지 않는 계곡의 좁은 틈은 그렇게 ‘진정한 지식’과 삶을 향해 떠나는 구도의 역정을 상징하고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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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상념을 쫓다가, 길을 되짚어 내려왔다.


- 다음에 도착한 곳이... 키질 천불동... 황막한 사막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식당이 하나 있긴 있었다. 버스는 몇번의 시행착오를 거치고, 결국 찾아냈다. 벽화 몇점이 걸린 식당에서, 식사를 했다. 고추장 볶음과 김 등을 꺼내놓는 것을 보니, 여행이 중반에 든 것을 실감한다.


카메라 가방을 맡기고, 두 팀으로 나누어 동굴을 올랐다. 벽화는 거의 훼손되었다. 뒤편에 와불이 있던 자리가 있고, 미륵보살이 뒤편에 자리잡고 있다. 검정색으로 색은 변했고, 눈은 다 파내어졌다. 11세기 이 지역을 점령한 이슬람의 만행일 것이다. “그래, 눈이 없어야 더 잘 볼 수 있다는 깨우침일 수도 있겠지...” 한 편에 칼로 벽화를 떼낸 자국이 선명했다. 가이드는 “스타인 등이 노련한(?) 기술로 떼어간 자리”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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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 설화와 교훈을 전하는 우화들이 편편이 보였다. 몇 개를 보다가 내려왔다. 맥적산이나 돈황에 비하면, 본 것이 거의 없었다. 베제클리크는 그렇다고 쳐도, “키질에는 손상되지 않은 동굴이 3-7세기 굴이 100여개 너머 존재한다”고 들었는데, 못 보고 가는구나.


훌륭한 가이드라면, 꽌시를 이용하든, 문제를 해결하려고 분투해야 한다. 그러나 내색은 하지 않았다. 그레코-부디스트 양식의 벽화를 제대로 만나지 못한 아쉬움은 컸다.


알렉산더 대왕의 원정의 영향이 이곳의 석굴로 이어졌다. 현장이 이곳을 지났는지는 알 수 없다. 만일 이곳을 방문했다면 강한 인상을 받았을 것이다. 프랑스 탐험가 그루세는 ‘현장을 투르판에서 쿠차까지 수행한 그림’이 있다고 알려주었다. 그는 이곳을 ‘고비 사막의 프러시아, 작은 서양사회’라고 묘사했다.


*쿠차의 왕도 독실한 불교신자였다. 이곳은 소승불교가 승했다. 현장은 소승을 열등하게(?) 보았다. 그래서, ‘무크차굽타’라는 승려와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이 인도식 기풍의 승려는 대승의 공(空)을 도무지 못 마땅해 했다. 불교는 ‘허무주의’가 아니라는 것... “세상은 실재한다, 그런데 어째서, 이 분명한 세상을 존재하지 않는다고 우기느냐... 그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심각하게 왜곡하는 것이다.” 현장은 대승의 唯識 경전을 ‘미륵보살’의 화신이 쓴 것이라고 변호한다. 권위에 기대는 것은 초보가 하는 것이 아닌가, 하며 나는 슬몃 웃었다.


두 해석의 차이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콘즈는 이 둘을 ‘옛 지혜학파(old wisdom schoo;)’ 와 ‘새 지혜학파(new wisdom school)’로 구분한다. 우리의 인식과 판단이 ‘자아’의 부당한 간섭으로 뒤틀려 있다고 했다. 옛 지혜학파는 그 ‘간섭’이 제거되면 ‘진정한 세계’가, 실재하는 세계가 드러날 것이라고 강조한다. 그것을 법(法)이라고 불렀고, 그 목록에 수백개가 있지만, 대표적으로는 색수상행식, 즉 오온(五蘊)을 든다. 그런데 대승은 <반야심경>이 첫머리에서 말하듯이, 色卽是空, 이 법(法)마저 공(空),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受想行識 亦復如是, 나머지도 다들 마찬가지이다. 차이가 선명히 느껴지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비틀즈의 옐로우 서브머린인가, 이런 예가 있다. 청소기가 먼지와 휴지를 신나게 빨아들인다. 다 처치(?)한 다음, 이번에는 청소기 자체가 어디론가로, 아마도 블랙홀 속으로 빨려들어간다. 전자를 소승, 후자를 대승이라 부를 수 있겠다...

상세한 것은 내가 번역한 E. Conze의 <Buddhism:Its Essence and Development>와 내가 쓴 허접한(?) 책들을 참고하면 좋겠다...

왕은 서로 철학(?)이 달랐음에도, 현장에게 낙타와 말, 승려들, 그리고 여행 경비를 보태주었다.


우리도 쿠차에서 현장과 헤어진다. 그는 서쪽 악수를 향해 카슈가르로 가고, 우리는 길을 되짚어, 쿠얼러로 향하게 되는 것이다. 언제 다시 현장과 이 길을 동행할 수 있을까. 카슈가르에서 파미르 고원을 넘어 여행을 할 기회가 있을까...


- 키질 석굴 앞에 미끈한 동상 하나가 서 있다... 쿠마라지바(구마라습)이다. 그 앞에 서자, 서교수님이 사진을 하나 찍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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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현장보다 구마라습과의 인연이 깊다. 현존 한역 <반야심경>은 현장의 번역이지만, <금강경>은 쿠마라지바의 것이다. <금강경>은 대승의 중심 경전이다. 사찰에서 늘, 날마다 염송하는 핵심 중의 핵심이다. 그래서 일곱 번인가 번역되었다. 최초의 번역자는 쿠마라지바, 여섯 번째가 현장역이었다.


<반야심경>은 조직적 압축적이지만, <금강경>은 반복과 운율이 있다. 쿠마라지바는 ‘중국인들’을 위해 과감한 생략과 소통적 변조를 아끼지 않았다. 현장은 정확한 불교를 지향하는 인물답게 이 ‘자유로움’이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는 현장의 <금강경>도 보았다. 애매한 부분에 명료함을 주고, 필요한 부분을 보완하여 큰 참고가 되었다. 그렇지만 전체적으로 너무 학구적이고 딱딱했다.


역사의 선택, 민중들의 손은 최초의 번역에 손을 들어주었다. 역시 ‘소통’이 관건이다. 구마라십은 번역의 곤혹 앞에서, “어린애가 밥을 씹어 애에게 먹이는 것과 같다”고 한 적이 있다. 소화를 위해서 풍미를 희생시킬 수밖에 없다는 뜻이겠다...

그가 번역한 <금강경>을 씹어, 책을 두 권 출판했다. 재작년의 일이다.

그 인세(?)로 지금 실크로드에 와서, 쿠마라지바를 만났으니, 예사로운 인연이 아니다. 그가 나를 부른 것일까. 그의 흔적은 바이 없고, 지금 청동색 잘 생긴 젊은이의 동상으로 나를 만나고 있다.


*구마라습은 인도계 아버지와 쿠산계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상좌부 불교를 공부했던 그는 카슈가르에서 대승불교를 배웠고, 순야타 즉 공(空)에 심취했다. 공과 연기(緣起)는 동전의 양면이다. 거기서 화엄(華嚴)이 자랐다. 화엄불교는 중앙아시아, 쿠차와 코탄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대승불교의 위용은 중앙아시아 없이는 생각할 수 없다. 산스크리트 본이 없이 한역만 전하는 가령, <대승기신론>도 아슈바고샤의 이름을 달고 있지만, 이곳에서 태어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럴 것이다.

쿠차에서 20여년간 공부한 그의 명성은 장안에 알려지게 된다. 황제의 초청으로 길을 떠난 그는 우리가 기차로 지나온 양주(즉 武威)에서 한 족장에게 잡혀 구금된다. 황제는 군대를 보내 그를 데려 왔다. 그때가 401년... 그곳에서 세상을 뜰 때까지 반야경과 중관 계통의 논서를 포함하여 수많은 경전을 번역한다.


그의 노력으로 불교는 중국땅에 확고히 자리잡게 된다. 현장이 길을 떠난 것은 그로부터 2백년이 지난 일이다. 그는 구마라습의 고향을 지나며 남다른 감회에 젖었을 것이다. “공기는 상쾌하고 사람들은 정직하다.”


*<대당서역기>에는 이런 이야기 하나가 전한다.


쿠차의 왕이 서역을 가고 싶어했다. 동생에게 전권을 위임했다. 동생은 자신의 성기를 잘라, 금으로 된 함에 넣고, 왕 앞에 놓았다. “이것이 무엇이냐?” “돌아오신 뒤에 열어보십시오.” 주변의 시기와 참소를 미리 내다본 조치였을 것이다. 왕이 떠난 후 어느 날, 동생은 500마리의 황소를 거세시키려는 목동을 보았다. 동병상련, 그는 돈과 보석으로 소들을 구해주었다. 그러자, 그의 거세된 부분이 다시 자랐다. 그는 여자들의 거처에 더 이상 들어가지 않았다.


- 버스는 쿠어러를 향해 달리고 있다. 옛 이름 언기 근처, 고선지 장군의 관할처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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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교수는 옛날 이야기 한 자락을 해 주었다. “내 덕에 산다?”


아버지는 묻는다. “누구 덕에 살지?” 두 딸은 정답을 알고 있다. “아버지 덕으로요...” 막내딸은 당당하게 말한다. “내 덕으로 살지요!”


리어왕이 이 이야기를 차용한 것은 아닐까. 아시아에 공통으로 있는 모티프란다... 세 딸의 이야기를 들으며 두 가지 생각이 들었다. 1) 아첨하는 자의 혀를 믿지 말 것... 2) 모든 성취는 남의 공이다. 인연의 법 가운데 자신의 역할은 아주 작다는 것을 깨달을 것... 중견 기업의 사장은 거만하다. 자신이 잘나서 성공한 줄 안다. 대기업을 움직이는 회장님은 이구동성 말한다. “나는 운이 좋았다!” 제 힘으로만 되는 일이 얼마나 되겠는가. 겸허하고, 또 겸허할 일이다.


P교수는 위구르출신의 ‘역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설장수의 5대조가 고창의 위구르인이었고, 원나라에 협력했다. 과거 합격자를 여럿 배출한 엘리트 가문으로 성장했다. 그의 가문은 원말 공민왕때, 고려로 귀환하여, 우왕때 대명외교에 활약했다. 설장수는 온건 개혁파로 이색 등과 교류하다가, 조선 건국후 귀양갔다가, 태조의 부름을 받는다. ‘역관 임무’에 종사... 사역원 초기에는 한어와 몽고어를 가르쳤고, 위구르 어까지 시험 과목에 있었다.


원나라에 귀화한 위구르인이 조선시대 사역원을 창설했다는 흥미진진한 이야기였다. 다문화는 오래되었다. 조선이 창구를 막았을 뿐.


- 쿠어러에 도착했다.


철문관(鐵門關)은 서역으로 난 관문이다. 현장도 혜초도 이곳을 지났다.

버스에서 내려 화장실을 찾았다. 다들 다녀 오는 동안, 나는 ‘자연의 부름’에 응대하기로 했다. 그런데, 웬걸, 큰 일 보는 칸에도 문이 없다! 이런... 외국인들은 몰라도, 우리 일행에게 보이기(?)는 좀 머쓱하다. 소변 보고 일행이 나가기를 기다렸다가, 바지를 내렸다. 아래쪽은 한 줄로 물줄기를 내려, 나름 위생적(?)이다. 일을 보고, 나오는데, 앞 뒤로 낯선 이방인들 사이에 끼었다. 약간의 위협을 느꼈다. 그래도 의연히 손을 씼고, 밖으로 나왔다. 아무도 없다... 나는 화장실 내려가는 방향으로 난 길을 걷기 시작했다... ‘가다 보면, 일행을 만나겠지’ 길은 하나밖에 없었다... 조금 가니, 왼쪽에 저수지가 있고, 차에서 중국인들이 내리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저 앞쪽 모퉁이를 우리 일행 중 흰옷 입은 누군가가 돌아가는 것이 보였다. “역시 이 길이네.. 멀리 못 갔네...” 그러나, 아무래도 약간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적막한, 이 느낌!!!

자전거를 타고 오는 허름한 농부가 있었다. 지나치려는 것을 잡고, 물었다. 브로큰 중국어로... “쩨이비엔 따오 티에관먼마(이쪽이 철관문 가는 길이냐?)” 농부는 이 주변이 철관문이라면서 손을 빙 둘려 보였다. “니칸궈 한궈런먼마(한국인들을 보았냐?)” 못 알아들었는지, 본 적이 없는지 애매한 표정으로 뭐라고 알 수 없는 말을 했다. “못 본 모양이다. 그럼... 아까 그 흰 옷의 뒤태는 뭐란 말인가?” 돌아오니, 몇 명이 차 앞에 서 있고, 사람들이 모이고 있었다. 저런 방향이 전혀 반대쪽이었다. 화장실 내려가는 쪽이 아니라, 오던 곳쪽으로 다들 몰려갔던 것이다. 길이 하나 밖에 없다고 생각했던 것도 오해였고, 흰 옷입은 일행도 착각이었던 것이다....


그렇구나... 현장은 여기 철문관을 나서면서, 사막의 ‘체험’을 내게 일러주고 간 것이 아닐까. 사막에서 가장 무서운 것이 ‘도적떼’와 ‘길을 잃는 것’이다. 1) 현장의 짐은 고창국의 왕이 붙여준 시종이 훔쳐갔고, 그는 사막의 재난과 귀신에 시달렸다. 2) 바람이 불 조짐이 있으면 낙타가 머리를 모래에 묻는다. 그것을 보고, 바로 천을 뒤집어 쓰고, 같이 웅크려야 한다. 한 바탕 모래가 지나가면, 사구는 전혀 다르게 변해 있다. 방향을 알지 못하고, 엉뚱한 길에 들어서기 일쑤이다. 그래서 잠들기 전에는 방향 표시를 해 두어야 했다고 한다. 3) 가장 무서운 것이 환청이고, 신기루이다.


- 현장은 천애를 격해, 사막의 길이 어떤지, 그리고 불교의 소식이 무엇인지를 내게 일러주고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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