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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고 31회 동기회

경남고등학교 제31회 동기회

4일. 돈황 막고굴, 그리고 투르판으로


- 새벽 날이 희부옇게 밝아오고 있다. 두런 거리는 소리, 양치하러 치솔을 들고가는 일행들이 보인다.

아침, 돈황 역에 내렸다. 역사는 깨끗하다. 새로 단장한 듯하다. 실크로드의 중심도시로, 세계적 관광자원임을 감안해서일 것이다. 가까운 호텔로 향했다. 간단한 아침 식사... 를 마치고, 그 옆 세미나 장으로 향했다.


그 전날의 유가협 호수 위에서 불붙던 전화가 생각났다. 돈황에서 투르판으로 가는 항공편이 테러를 우려한 중국 당국의 결정으로 막혔다는 것... 우르무치로 갔다가 버스로 투르판으로 갈 수밖에 없다는 것인데... 그 변경 사항을 확인 조정하느라고, 유가협 페리의 소음 속에서 가이드와 인솔단이 긴장된 얼굴로 대책을 논의하던 모습이 떠오른다.

그런데 다행이다. 투르판으로 가는 항공편이 여행사들의 집단 항의로 ‘임시’ 개통하기로 했다는 것... 그래서 오늘 돈황 일정은 한결 여유가 있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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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미나 장에는 작달막한 체구에 단단한 얼굴의 강사가 노트북을 만지고 있다. 주제는 돈황 석굴 내의 한국관련 도상에 관한 것이었다. 오대산도(五臺山圖) 안의 신라송공사, 고려왕사, 신라 왕탑이 인상적이었다. 새 깃털 모영의 모자, 조우관, 혹은 조미관을 꽂은 한반도 인물들이 흥미로왔다. 고구려 백제의 복식은 비슷하다. 자장이 세웠다는 오대산 탑이 인상적이었다.


*그러고 보니, 7세기 초반 중국과 반도를 오가며, 불교를 대표하던 인물이 역시 자장이었다. 진평왕과 선덕여왕대에 활약했다. 그의 권유로 황룡사 9층탑을 세운 것은 특기할 만하다. 나중 우루무치 근처의 버스 안에서 S교수는 “그게 다 백성들의 고혈이고, 큰 희생이었다”고 상을 찌푸렸다. 나는 그게 그렇게만 볼 것이냐고 반문했다. “지금의 부는 잉여는 엔터테인먼트에 투자된다. 영화나 연극, 인터넷 게임 등이다. 예전에는 종교적 열망에 집중된다. 이집트의 피라미드, 터키의 소피아 성당처럼... 황룡사 9층탑은 종교적 상징이자 정치적 무기였다. 고구려가 그 위용에 놀라 신라를 치기를 망설였다고도 하지 않는가. 그게 순 변명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몽골의 잔학이 아니었다면, 신라 벌판의 랜드마크로 우뚝 서 있을 것인데, 아쉽고도 아쉽다.”


그는 자신의 논문 하나를 건네주었다. 삼국의 전쟁을 한반도 내부가 아니라, 서역을 포함하는 아시아의 판도 하에서 조명할 필요가 있다는 것... 나는 닫힌 눈 하나를 뜬 느낌이었다. 


청해의 토욕혼과, 현장의 고창을 당태종이 정절해 복속시켰지만, 이은 645년의 고구려 정벌이 실패하고, 그 이후 이어진 한반도 경략에 당제국이 힘을 빼자, 중앙아시아의 서돌궐 제국, 타림 분지의 소국들이 속속, 독립하고, 친당 세력을 몰아냈다. 

<신당서> <구당서>를 보면, 망명해 오는 이 지역 귀족들이 많았던 것이 그 증좌라고 했다. 이 독립운동(?)의 구심적 배후는 토번이었다. 백제가 멸망한 것이 660년, 그리고 고구려는 668년에 무너진다. 그 후 1, 2년... 신라는 당나라의 한반도 경략 기도에 크게 반발하지 않다가, 갑자기(?) 대당 전쟁에 기치를 세우게 된다. 왜 그랬을까? 아시아 전체의 세력 판도를 읽어야 하는대목이다. 


대당 화해를 상징하는 송첸캄포가 죽고 나서, 녹동찬이 실권을 잡았다. 그를 이은 자식들이 대당과 군사적 대치를 본격화했다. 자신들의 '존재감'과 세력 유지를 위해서였을 것이다. 

당은 한반도의 군사를 빼내 대 토번전에 투입할 수밖에 없었다. 신라는 이 판도의 변화를 분명히 알고 있었고, 이 기회를 잡아, 대당 전쟁, 일전불사를 감행하게 된다. 이 ‘정세 변화’ 없이, 신라의 당군 축출을 그저 민족주의적 ‘결의’만으로 해석해서는 안된다는 서교수님의 진단에 전폭 동의한다. 설인귀가 청해에서 대패하자, 당은 더 이상, 신라와의 전투를 본격화하기 어렵다고 판단한다. 그래서 한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신라에는 인물이 많았다. 지도자들이 국제적 안목과, 그리고 현장에서 잔뼈가 굵었다는 것, 그리고 지도자들 사이의 협력이 결정적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김춘추가 648년, 당태종을 만나러 갔을 때, 군사를 논하지 않고, 태학부터 ‘여유있게’ 둘러보았다는 그 배짱과 전략에 감탄한 적이 있다. 김춘추는 당태종의 ‘의중’과 초조함을 한 눈에 읽고 있었다는 얘기이다. 협상의 기초는, ‘절박함’을 내보여서는 안된다는 것... 신라는 당의 힘이 절실했지만, 고구려에 대패한 당의 현실이 더 다급할 것임을 읽었던 것이다. 전쟁은 현실 위의 게임이다. 조선조의 ‘북벌’은 현실감보다 명분이나 자존심에 붙잡힌, 그래서 현실적 동력을 확보할 수 없었던 것이 아닌가. 지배층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쯥.


그가 백제에서 확인한 8개 성씨는 좀 의아스럽다. 근거가 무엇인지 묻고 싶었는데 확인하지못했다. 洛, 貝, 泉, 眞(貞) 등은 지금 없다. 백제 멸망으로 사라져서 그러한가. 신라의 성씨들, 朴, 金 등이 지배해서 그러한가... 그냥 의문으로 우선 남겨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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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강의를 마치고, 직접 막고굴을 인솔 해설해 주었다. 세미나는 중국어로 진행하고, 통역을 이용했는데, 어라, 한국말이 유창했다. 돈황 연구소의 몇 백명 가운데, 몇 명 없다 한다.


일반인들에게 잠겨 있는 막고굴의 내부를 직접 열쇠를 가지고 다니면서 열어주고 설명해 주었다. 훼손은 심했지만, 영롱한 벽화들이 생생했다. 도판으로 보는 것과는 다른 ‘질감’과 ‘공간’을 느끼게 해 주었다.


북위에서 송대에 걸쳐 조성된 것들 가운데... 송대 귀부인과 귀족들의 원력으로 세워진 것들도 있었다. 절도사들은 자신들의 안위와 기복을 위해 굴을 파고, 벽화를 세운다음, 자신들의 이름과 모습까지 새겨 두었다. 허망한 노릇이 아니랴. 그들은 지금 다 어디 갔을까. 북경이나 상해에서 그 후손들은 떵떵거리고 살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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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인상적인 것은 대불을 만나기 전에 열렸던 동굴이었다. 어느 한국인 교수가 방학만 되면, 그 굴에서 하루 종일을 보고 있다던 그 굴... 정자와 풀과 정원이 있고, 하늘에서 선녀가 날으고, 북과 장고의 음악이 연주되는 천상의 나라를 그린 것이었다. 묘사가 세밀하고, 선명하다. 지금 그린 듯, 흡사 그 속에 살고 있는 듯한 느낌에, 아득했다.


시간은 두 시가 가까와 오고 있었다. 그는 하나를 더 보여주겠다고 우리를 이끌었다.


내 머리 속은 아까 본 동굴의 이미지를 파일로 하나 받을 수 없을까...로 잔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서점에서 다들, 돈황의 도록을 하나씩 사 들고 모일 때, 나는 그에게 조심스럽게 부탁을 해 보았다. 그는 어느 동굴인지 알아듣지 못한 표정을 했다. 내가 이미지 파일을 얘기하자, “통제가 심하다”고 난색을 표했다. 할 수 없는 일이다.

마지막으로 ‘막고굴’이라는 이름의 유래에 대해 물어보았다. 가이드는 중국어로 된 빽빽한 노트를 보여주었다. 세 가지 설이 있다. 한다. 1) 지역의 이름... 2) 깨달음이라는 뜻... 3) 사막의 높은 지대...


3) 莫=漠을 가리키고, 高라, 이 지역은 다른 지역보다 높다. 아크로폴리스나 처럼, 사람들은 사람이나 신분의 높낮이를 지역의 높낮이로 가늠한다. 그래서 壇上을 선호했다. 그게 아니라면 사과 궤짝이라도 놓고, 자신이 지위나 정신에서 ‘높다’고 우긴다. 수십년전 런던에 여행갔을 때, 기차역앞에서 궤짝 위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던 거리의 전도사랑 얘기를 나눈 생각이 났다.

2)는 새롭다. ‘깨달음’을 가리키는 산스크리트어에 moksa가 있다. 프라크르티나 이 지역어로 mokka가 있었던 듯하다.

어느 설이 맞는지는 알 수 없다... 그렇지만, 2)는 너무 철학적이다. 그리고 이 굴은 맥적산과 다르게, 깨달음보다는 ‘귀의’에 촛점을 두고 있다. 나는 1)과 3)이 기실 같은 말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 두 설이 맞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늦은 점심을 먹었다.


- 버스는 얼마 안 가서,,, 사막에 우리를 데려다 주었다. 명사산이다. 바람이 불면 모래가 우는 곳... 나는 비로소 서역의 바람과 사막 앞에, 선 듯한 느낌을 받았다. 표지석 앞에서 팔을 벌리고 사진을 하나 찍었다.

아, 자유의 바람, 저 멀리 푸른 산, 사막에서 불어오는, 영혼의 바람, 이 길을 따라 걸어간 자들, 그 부서진 뼈들에게 축복을...

실크로드... 내가 생각한 원초적 이미지는... “뼈를 묻기 좋은 곳이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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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 둔덕을 향해 터벅터벅 걸어보았다. 고운 모래들의 길... 등성이 너머 오아시스 월아천까지, 샌들을 벗고 걸었다. 모래는 뜨거웠다. 참고 걸었다. 순례자들도 그러했으리라... 오아시스 주변에 모래는 젖어 있다. “저곳은 뜨겁지 않을 것이다.” 이 길 너머에 시원한 감로의 나라, 서방 정토가 있을 것이라는 믿음으로 그들은 걷고 또 걸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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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행색도 예전 순례자의 그것과 다를 바 없다. 돈황본 구법승의 그림을 보면, 챙이 넓은 모자를 쓰고 있고, 등에는 텐트 등 일상의 짐을 지고 있다. 숄 같은 것으로 몸을 감싸고 있으며, 무엇보다, 지금의 스포츠 샌들과 비슷한 가죽신을 신고 있지 않은가. 사막을 건너는 무장(?)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다.


그 뒤로 부처님 혹은 보살, 선녀들이 구름 무늬를 거느리고 구법승을 따르고 있다. 그들은 그런 점에서 혼자가 아니었다. 우리 머리 위에도 그분이 따라오면서 호념(護念), 지키고 기억해주고 있을지 모른다. 큰 사고 없이 여행을 마치게 된 것도 그 원호인지 모를 일이다. 돌.


나는 그 옛날의 구법승이 된 기분으로 사막을... 걸어보았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그렇구나. “유교는 이 <길의 체험>을 결여하고 있구나.” 목숨을 걸고 나선, 모험과 구도... 유교의 모험과 구도의 장은 오직 ‘일상’이었다. 가족과 친구, 그리고 정치의 한 가운데였던 것... 그러나 그곳은 목숨을 걸고 나서는 길이 아니지 않은가. 그리고 무엇보다, 일상의 ‘너머’에서 일상을 조망하는 지평선의 전망을 키울 수 없었던 것이 아니냐. 그래서 그렇게들 ‘쪼잔하고’ 달팽이 뿔 위에서, 의례와 정치의 특권, 그리고 서푼어치 명예를 위해 목숨을 걸었던 것이 아닐까... 그들이 ‘길 위에’ 나설 때는 사약를 받거나, 유배를 갈 때이다. 그때 그는 진정, 급속히 성장한다. 역경 없이 큰 인물이 된 경우는 드물다. 아니면 스스로 물러나 냉각과 성찰의 시간을 갖는다.


- 월아천에는 정자 하나가 덩그렇다. 사막을 여행하는 고관 등 특권층을 위한 휴식터이다. 음료수와 차 등을 파는 가게가 진을 치고 있다. “사막에도 계급은 존재한다.” 무료 벤치에 앉아 뜨거운 발을 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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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버스로 돌아오는 길에는 낙타를 탔다. 앉았다 서는 폼이 극히 세련되었다. 코앞의 낙타를 따라가는 습성에, 불평 한 마디 없다. 사막 위의 낙타... 달빛만 있으면 마르코 폴로 등에서 묘사된, 실크로드의 전형적 풍경이다.


- 저녁 돈황에서 투르판행 비행기에 올랐다. 승객은 몇 명 없었다. 비행기가 예정시간보다 일찍, 그것도 30분이나 일찍 출발하는 경험은 생전에 처음이다. 앞으로도 없을 듯. 중국의 보이는 개방보다, 보이지 않는 통제와 규율을 선명하게 체험시켜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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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기는 천산의 구름 위를 날았다. 손오공처럼, 현장과 대면시켜주는 장치인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우리가 비행기로 투르판으로 가고 있는 그 시각, 현장은 아까의 과주에서 육로로 길을 잡아 이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한밤중 칼을 들고 다가왔던 반두는 결국, 고향으로 돌아갔다. 옥문관을 지난 현장은 “혼자 남겨진 채, 모래 황야를 건넜다. 보이는 것은 수북한 해골 뿐이었고, 가다가 툭하면 말에서 떨어졌다.” 졸았을 것이다. 현장은 환각에 시달렸다. “모피와 펠트를 두른 수백명의 사람들이 말을 둘러써고 있는 환영이 보였다. 낙타가 사막에서 나타나 사라지기도 했다. 저 멀리 얼굴이 천만가지로 바뀌는 사람과 낙타들이 나타났다가, 손에 잡힐 듯하다가, 형체도 없이 사라졌다.” 허공에서 울리는 외침이 들렸다. “두려워 마라, 두려워 마라.” 80리를 가서 첫 망대가 나타났다. 화살이 날아와 무릎을 스쳤다. 수비대장은 돈황으로 돌아가라고 했다. “직접 안내를 해 주겠다.” 현장은 거절했고, 그의 소개장으로 네번째 망루까지 갈 수 있었다. 그러나 마지막 다섯번째 관문은 ‘포악한 파수병들이 지키고 있어’ 쉽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현장은 다른 길로, 사막으로 뛰어들었다 .

“새 한 마리 없고, 풀 한 포기 없는... 벌레 한 마리도,물한 줌도 없는 길을... 그저 <반야심경>을 외며 앞으로, 앞으로 나아갔다.

1백리를 가도 샘물은 나오지 않았다. 그나마 갖고 있던 물도, 마시려다가 모래에 쏟고 말았다. 방향도 알 수 없었다. 그저 북서쪽이라 여겨지는 길을 향해 걸음을 떼 놓았다. “가도 가도 끝이 없었다.” 밤에는 도깨비불이, 낮에는 모래바람이 몰아쳤다. 4일밤 5일 낮을 물도 없이 걸었다. 드러누워 자비의 보살에게 기도했다. 갑자기 차가운 바람이 불었고, 원기를 회복한 그는 말을 재촉했다. 10리를 지나자, 말이 다른 방향으로 뛰기 시작해다. 몇 리를 가자 놀랍게도 풀밭이 보였다. 신기루가 아니었다. 조금 더 가니, “거울 처럼 맑고 투명한 물 웅덩이”가 있었다.


나중, ‘약탈자’ ‘도굴꾼’으로 불린 오렐 스타인이 현장의 이 길을 탐험했다. 그는 고고학적 측정을 사용해 다섯개의 망대를 찾아냈다. 마지막 망대에서 투르판 가는 길, 하미까지의 거리가 193킬로미터였다. 스타인은 <대당서역기>의 기록 가운데, 나흘간을 물 없이 헤맸다는 기록이 과장이나 거짓이 아니라고 확인했다.


- 투르판 공항에 내렸다. 허허벌판의 공항에, 붉은 글씨로 이름이 적혀 있었다. 한자 +이슬람 문자로... ‘중국’이라지만, 전혀 다른 ‘문화’와 ‘민족’의 지역에 와 있다는 것을 그 낯선 문자 하나가 웅변해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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