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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고 31회 동기회

경남고등학교 제31회 동기회

6일. 투르판에서 쿠차로 가는 길


- 현장이 대화를 건 것일까. 어젯밤 꿈을 꾸었다. 네 장면이 선명하다. 보통 깨고 나면 잘 기억나지 않는 것이 꿈인데...


1) 고창의 왕자였던 듯하다. 머리가 없었다. 그는 머리 없는 자신을 두고 비탄에 빠져 있었다. 나는 그를 위해 설법을 했다. “나도 머리가 있는지 없는지 모른다. ‘생각’으로 알려 하면 실상을 놓친다. 머리가 없다면, 너는 존재할 수 없다. 무엇보다 머리가 없다면 ‘생각’도 없을 것이다. ‘나는 머리가 없다’는 ‘판단’은 역설적으로 머리가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알겠느냐? 의아해 하는 그를 두고 나는 덧붙였다. 그러나 누가 알리. ‘나도 너도 머리가 있는지 없는지 모른다.’ 머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착각인지... 그렇다면, 머리가 있는지 없는지 아무도 알 수 없다는 말인가?” (*나중, 돌이켜 보니, 이 논제는 현장과 쿠차의 승려 사이에 있었던 것과 닮았다.)


경주 박물관 경내에도 머리 없는 부처들이 즐비하다. 아이들은 거기 자신의 머리를 들이대고 시시덕거린다. 정호승 시인의 말대로, 아이들이, 우리 모두가 ‘붓다’임을 알려주시려고, 그렇게 자신의 머리를 잘랐다!

나는 설명을 실증하기 위해 ‘우물’ 속으로 천천히 내려갔다. 목이 잠기고 머리가 잠길 때까지 내려갔는데, 왜 그랬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2) 모래 밭, 통나무로 얽은 감옥같은 곳에... 주변에 사람의 마른 뼈가 널려져 있었다. 그 속을 오갔다. 오늘 둘러본 고창이나 교하 고성인지 모른다. 사막을 헤매다 죽은 자들의 표지일 수도 있다. 그러다가 외쳤다. “저기가 문이다.”



- 쿠차로 향해 버스는 출발했다. 하루 종일을 달려야 한다. ‘버스 강의’가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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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도에서 16년을 사셨다는 K선생님..


“전통적 4계급은 55% 밖에 되지 않는다. 요리사는 브라만 계급이다. 不淨한 손으로 신성한 음식을 다룰 수 없다는 뜻. 인도는 인생의 네 단계를 설정한다. 가족과 사회의 의무를 다하면 ‘자신을 찾는 시기’를 갖는다. 고위 공무원이나 판사를 지낸 사람들이 훌훌 벗고, 지팡이 하나 짚고, 천조각을 걸치고 길을 떠난다....

“인도인들은 논쟁에 밝고 말을 잘 한다. 언제나 on the way를 외치고, no problem...이 입에 달려 있다. 자기 문제가 아니라는 낙관(?)... 뻑하면 friend임을 과시한다. ‘가지 요리’의 우스개처럼, 필요에 따라, 적응력이 빠르다. ‘임금님한테 잘 보이면 되었지, 가지한테 잘 보일 것까지야 없지 않겠습니까?’”


말씀하신 네번째 단계는 전통적으로는 森林期라 한다. 한국에는 이 ‘기간’이 없다. 그래서 한 없이 달려가기만 하고, 멈출줄 모르고, 올라가느라 허위적거리다, 내려올 하산기가 되면, 그만 당황한다. 마음의 준비도 아니 되어 있고, ‘지적 훈련’이 다져져 있지 않다. 쇼펜하우어 왈, 구원은 ‘지적인 삶’에 있다고 했다. 그것은 대학 교육이나 문자 독해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필요’의 세상너머에 동기와 추동력을 갖는 것을 말한다. 육신의 쾌락은 긴장의 이완 해소일 뿐이다. 그 너머엔 한 없는 ‘권태의 바다’가 기다리고 있다. 이 시계추를 돌파하는 힘이 필요하다. 각설...


- 마칠 때쯤, 내게 ‘인도에 불교가 사라진 이유’를 묻는다. 세 가지를 들었다.


“금강경에는 ‘後五百世’라는 것이 나온다. 붓다 입멸 후 ‘다섯번째, 최후의 오백년’이란 뜻이다. ‘제행무상, 일체의 것이 순간이고, 변화하며, 영속하는 것은 없다’고 외친 불교가 자신의 가르침만이 영원할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기원 전후하여 불교에는 쇠퇴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우고, 비관론이 득세하기 시작한다. 쇠퇴의 시기를, 세 단계로 나누기도 하고, 다섯 단계로 나누기도 한다.

“다섯 시기로 가르는 것은 1) 진정한 깨달음이 가능한 시기, 2) 명상과 고요가 살아있는 시기, 3) 불교의 지식이 소통 교환되는 시기, 4)공양과 예배만 살아있는 시기. 5) 절간의 소유를 두고 다투는 시기로 가른다... 한국 불교는 2), 3), 4), 5)가 복합되어 있다. 1)의 소식은 아득하다.”


바수반두(世親)의 음울한 예언을 기억한다. “그런 때가 오리라. 무지의 파도가 범람하고, 붓다의 가르침이 마지막 숨을 내쉬는 그 날이…”


인도에 불교가 사라진 이유는 1) 이 자연적 쇠퇴 외에 두 가지 이유가 더 있다. 2) 불교와 브라만 사이에 경계가 모호해진 것이다. 붓다의 초기 가르침은 독립적이고 자유로왔다. 통념과 미신에 휩쓸리지 않고, 계급적 차별에 물들지 않고, 지적 합리적이었다. 그러다가 대승이 발전하면서 수많은 신들의 세계를 다시 불러왔고, 이론적 지평 또한 나중 브라만의 천재 샹카라가 발전시켰다. 신화(종교)와 철학이 공히 브라만과 겹쳐지게 된 것이다. 사람들은 굳이 불교에 의뢰할 필요가 없어졌다. 3) 역시 결정적인 것은 이슬람이다. 쇠퇴해 가고, 독자적 칼라가 희미하던 불교에 최후의 일격을 날렸다고 볼 수 있다. 인도에서 불교는 사라지고, 동아시아에 불교가 옮겨갔다.


*지금 인도에 불교가 다시 부흥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린다. 앞의 계급 가운데 ‘불가촉천민(untouchable)’들이 있다. 접촉해서는 안되는 사람들...그 천민들이 불교의 ’평등‘과 ’구원‘에 영감을 받아 불교로 개종하고 있다. 지도자는 암베드카르이다. 허우성 교수의 번역으로 이 사람의 전기가 나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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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이크를 든 김에... 어제 고창 고성에서 단장님의 ‘금강’이라는 개념을 짚어보았다.


*붓다의 입멸 이후 교단은 멘붕에 빠졌다. 이곳 석굴들에 열반상이 많은 것도 그의 카리스마와 깊은 관련이 있다. 붓다는 “내가 아니라 너희들 자신과 그리고 법(진리)에 의지하라‘고 했지만, 보이는 경배와 믿음의 대상이 필요했다. 붓다의 몸은 유골은 수없이 나누어져, 흩어졌다. 그것을 모신 것이 스투파(stupa 塔)이다. 교하의 거대한 불탑도 그 하나이다.

불탑이 ‘금강’의 성질을 갖고 있다고 해서 ‘금강불탑’일 것이다. 금강은 다이아몬드를 말한다. 콘즈가 <금강경>을 Diamond Sutra 라고 번역한 것을 보라... 특성은 셋이다. 1) 무지 비싸다... 2) 무엇이든 짜른다... 3) 그 무엇에도 부서지지 않는다.

이 특성을 가진 것이 무엇일까... 원효의 <금강삼매경론>은 금강을 가진 수많은 용례에 대해 분석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금강반야, 금강삼매, 금강불성 등이 있다. 이 반야(지혜)는 1) 우주 안의 어떤 보물보다 귀하다. 2) 그것은 인간의 뿌리깊은 번뇌와 고통을 제거하는 칼이다. 3) 그리고 3) 이 지혜는 그 무엇에도, 번뇌와 절망의 한 가운데에서도 사라지거나 부서지지 않는다.

금강불탑 또한 챠이티야, 그 공경과 귀의를 통해 영원의 삶을 누리게 될 것이라는 것을 보증(?)하고 있다...

더 궁금하시면, 내가 쓴 <금강경> 해설 두 권이 도움이 될 듯하다.


- 버스는 설산을 바라보며 달리고 있다. 산 위에만 구름이 떠 있다. 나는 문득, 박상륭의 <죽음의 한 연구>라는 소설(?)을 떠올렸다. 유리의 구도 도정을 담고 있는 그 기이한 작품의 서두는 이렇게 시작한다.


“공문(空門)의 안뜰에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바깥뜰에 있는 것도 아니어서, 수도도 정도에 들어선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세상살이의 정도에 들어선 것도 아니어서, 중도 아니고 그렇다고 속중(俗衆)도 아니어서, 그냥 걸사(乞士)라거나 돌팔이중이라고 해야 할 것들 중의 어떤 것들은, 그 영봉을 구름에 머리 감기는 동녘 운산으로나, 사철 눈에 덮여 천년 동정스런 북녘 눈뫼로나, 미친 년 오줌 누듯 여덟 달간이나 비가 내리지만 겨울 또한 혹독한 법 없는 서녘 비골로도 찾아가지만, 별로 찌는 듯한 더위는 아니라도 갈증이 계속되며 그늘도 또한 없고 해가 떠 있어도 그렇게 눈부신 법 없는데다, 우계에는 안개비나 조금 오다 그친다는 남녘 유리로도 모인다.”


꼭 저기 설산... 천산을 그린 듯하지 않은가. “그 영봉을 구름에 머리 감기는 동녘 운산으로나, 사철 눈에 덮여 천년 동정스런 북녘 눈뫼로나...” 만연체지만, 어느 한 단어 허투루 박혀 있지 않은 완전한 문장이다. 대학 1학년때, 불그죽죽한 그 책을 읽다 놀라고, 좌절했던 기억이 선연하다. 그를 한번 만난 적이 있다. 시인 이문재가 나를 이끌었다. 10년이 채 안되었을까, 역시 기인의 풍모였다. 대낮인데도 술에 취해 있었고, 나를 보자, 경계하며, 기를 꺾겠다는 것인지... 첫 마디가, “저 **는 왜 데려왔어?” 였다. 나는 그저 앉아 있었다...


다시 삶은 역설이고, 새옹지마이다. 사막, 물 하나 풀뿌리 하나 없는 듯하지만, 그 속으로 시원한 샘물, 오아시스가 있고, 카레즈의 물길이 있다. 황막한 삶에도 구원이 있는 법이다. 아니다. 내가 사막에서 느낀 것은, “황막하기에 거기 진정 삶이 있다”는 것이다. 편리와 인습을 따라, 조금의 불편과 고통을 참지 못해, 우리는 진정 삶을 소모하고, 황폐화시키고 있는지 모른다. 시프트 다운, 삶을 찾아 떠나는 순례객들은 자청해서, 불편을 감내하고, 위험과 불확실성 속으로 뛰어든다. 가이드의 말대로, 고생을 해 보아야 기억에 남는 법이다. 길 한 가운데 차가 고장나서 한 밤중까지 사막의 열기와 화를 식혔다는 어느 여행단들이 그러했을 것이다.


그래서 말이 있다. “괜찮은 것은 진정 좋은 것의 적이다. the better is the enemy of the best!"


그럼, 우리 순례단도, 돌발에 묶이고, 예기치 않은 고생을 좀 더 했어야 했나? 아 저기, 인상 찌푸리시는 분이 많겠다.


- 버스는 계속 달리고 있다. 나중에라도 기억할 수 있도록, 삶에 습기가 축축하고, 짜증이 밀려올 때, 혹은 삶이 나를 속일 때, 떠올리기 위해서 저 ‘풍경들’을 마음의 렌즈에 가득 담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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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장님이 마이크를 잡고, 불교미술사 한 자락을 들려주셨다.


석굴에는 변상도가 많다. 아미타 신앙에 대해서... 1) <아미타경>이 있다. 아미타불은 무량수불, 혹은 무량광불이라고 한다. 무한한 수명, 무한한 빛의 부처...이다. “내 이름을 열 번만 외면 극락에 왕생할 수 있다.

극락에는 ‘여성’도 갈 수 있을까? “극락에는 여자가 없다”라는 말이, “여자는 극락에 갈 수 없다”로 해석(?) 외곡되었다... 두 말은 극히 다르다. 변상도에서는 연못 등 극락의 풍경이 그려져 있다.

2) <관무량수경>... 어떻게 그곳을 볼 수 있을까... 경의 서품은 왜 극락을 원하게 되었는가로 시작한다. 아들이 아버지를 감금하고 왕이 되었다. 그런데 어머니가 몰래, 영락 목걸이에 꿀을 채워 아버지에게 갖다 주었다. 아들이 사실을 알고 노했다. 어머니를 죽이겠다고 하자, 다들 떠나겠다고 반발했다. “천하에, 어머니를 죽인 아들은 없습니다.” 어머니 위제히는 부처님께, 이 기막힌 사태를 하소연했다. “이런 슬픔과 비극이 없는 곳으로..”’

부처님은 극락을 보여주었다. 그것을 보기 위해 16가지 관법을 익혀야 한다. 그 중에서 ‘서쪽으로 지는 해,’ ‘보배 연못’, ‘관세음보살’ 등이 있다. 이들을 명상하면 극락을 볼 수 있다고 한다.

이 경전의 메세지를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 <변상도>이다. 아미타경 변상도, 관무량수경 변상도가 있다.


강의를 들으며 생각했다. <관무량수경> 이전에 다양한 선관(禪觀) 수행서가 있었다. 사막은 역시 명상의 땅이다. ‘차단(止)’과 ‘관찰(觀)’을 동시에 진행시켜야 한다. ‘차단’만 하면, 깊디 깊은 우물속으로 빠지는 수가 있다. 또 그 도정에서 수많은 ‘귀신’들이 수행자를 괴롭힌다. 그 실제 경험들이 이 사막 속에서 기록되고 경계되었을 것이다. <대승기신론>은 그 짧은 글 속에, 명상 중에 나타나는 수많은 귀신과 환락의 환상에 대해 적고 있다.


“수행의 도중에 “귀신 도깨비들이 온갖 공포스런 형상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혹은 아릿따운 여인네의 요염한 얼굴로 눈앞에 나타나기도 한다. 거기 흔들리지 마라. 그것들은 다만 허깨비들일 뿐이다. 천상의 보살이나 신격으로 등장하여 경전을 설하기도 하고, 지계(持戒) 인욕(忍辱), 선정(禪定) 등을 거룩하게 강의하기도 한다. 혹은 과거생에 너는 누구였다고 일러주기도 하고, 미래의 사태에 대해 예언을 해주기도 한다. 남의 속마음을 알아맞추기도 하고, 청산유수 장황한 언변을 자랑하기도 한다. 세간의 명리(名利)에 악착같이 들러붙게 하는가 하면, 화를 냈다가 금방 히죽거리게 만들기도 한다. 무한한 동정심에 젖게 했다가, 문득 내리 졸게 하기도 하고, 혹은 병에 시달리게 하기도 하며, 늘어지게 게으름을 피게도 한다. 그러다가 벌떡 일어나 정진을 하는가 하면, 에라 모르겠다 작파하기도 한다. 불신과 의혹에 사로잡혔다가 생각이 많아지기도 하고, 또 혹은 수행을 작파하고, 세속 잡사에 골몰하기도 한다.”

“이 장애들을 뚫고 나갔다고 해서 일이 끝난 것은 아니다. “하루, 이틀, 일주일쯤에 맛있는 음식을 미인이 들고 나타나기도 하고, 심신이 쾌적하고 배고픔도 사라진 경지가 나타나기도 한다. 폭식과 절식을 반복하게 하기도 하고, 사람 얼굴을 추하게도 만들었다 잘 생기게도 했다가 하기도 한다. 하여간, 이런 현상들은 그동안 정신에 찌들어있던 업장의 발현일 뿐이다.” 그것들을 다만 지혜로 관찰할 뿐, 들러붙거나 잡아채지 말고 ‘생각 하나’로 오로지 밀고 나가라. 그럼 업장들이 절로 점점 떨어져 나갈 것이다.


<관무량수경> 이전에, ‘예비’의 여러 경전들이 있었다. 야마베 노부유시는 <관불삼매해경>을 비롯해 10여개의 경전을 목록하고 있다. 투르판 키질에서 발견된, 출처 불명의 산스크리트어로 쓰인 관법 단편들을 딜링크로프가 <Yogalehrbuch>로 묶었는데, 이들을 대조해 보면, 그 성격이 뚜렷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경전들 속에는 요가 삼매경 속에서 나타나는 귀신들 뿐 아니라, 자신의 몸 속에서 칼이 나와, 자신의 사지를 절단하는 무시무시한 형상도 보는 장면이 나온다. 


그렇구나.. 이해가 된다. ‘오온개공’의 실증 아닌가. “중심은 없다!” 자아의 통일체는 없고, 오직 단편의 사지들(오온)이 “그저 짚단처럼 쌓여 있는 것(蘊)”이 바로 실상이다. 그리이스의 왕 메난드로스에게 승려 나가세나가 답한다. “수레는 없습니다. 다만, 굴대, 바퀴, 고삐 등이 있을 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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