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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고 31회 동기회

경남고등학교 제31회 동기회

수영장은 안 가는 체질이다. 동해의 큰 바다에서, 헤엄치던 싸나히가 ‘물통’ 속에서 놀소냐...


최근, 어깨가 말을 듣지 않고, 소매를 꿰면 극심한 통증이 비명을 지르게 했다. 소박사가 지나가듯 던진, ‘수영’이 가슴에 꽂혔다.


1.

집 뒤 숲의 개운산스포츠 센터... 수영복 하나만 걸치고, 풀에 들어가, 어려서부터 하던 대로 ‘평형’을, 조심스럽게 헤치는데, 뒤에서 자꾸만 부딛치고 옆은 걸리적거린다... 아하, 머리캡에, 고글을 낀 남녀노소들이 ‘자유영’을 (*이거 이름 고쳐야 한다.) 날렵하게, 그리고 부산하게 밀치며 나아간다. 기어코 한 소리... “방해는 되지 않게 하셔야죠. 아무리 자유수영이지만...” 


다음날은 조금 일찍 갔다. 풀에 들어가려는 나를 여자강사인듯한 인상이 물 속에서 소리쳤다. “아직 시간 안 됐어요. 8시부터잖아요.”


샤워실에서 ‘준비운동’ 하다가, 시간 맞추, 풀에 들어갔다. 그런데, 옆에 있던 젊은이의 표정이 좀 마뜩찮다. 조심스런 목소리로 말한다. “저기, 자유수영 레인은 저쪽 끝인데요...” 


새 ‘환경’에 적응하는데 이틀간, 세 번의 ‘지청구’를 먹어야 했다. 나름대로 노하우를 터득했다. 8시 정각에서 20분 집중적 훈련(?). 사람이 별로 없을 때이다. 뒤따라오는 사람과 부닥치지 않도록 부지런히 몸을 놀려댄다. 스스로 다짐한다. “어이, 동해 알바트로스, 여기는 바다가 아니야!”


2. 

샤워를 마치고, 가방을 메고 나오면서, 풀장이 도회 삶의 축도라는 생각이 들었다. 


1) 사회생활에는 여유가 없다. 레인은 좁고 속도는 필수. 몸을 최대한 줄여, 좁은 레인을 따라 일정한 속도를 유지해야 한다. 시간은 빡빡하고, 사람들은 느긋이 기다려주지 않는다. 그 ‘동원’의 시스템 하에서 남보다 앞서 나가야 한다.

피로사회... 사람들은 쉬 늙고, 스트레스는 가중된다. 쉬프트 다운, 기어를 내릴 수 있을까.

외국인들의 눈에, 작고 좁은 레인에서 너나 없이 ‘자유형(아마도 자유영의 와음?)’을 필사적으로 몸부림치는 한국인들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들었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함석헌 옹의 명언이 있다. “다들 맴맴 맴을 돌고 있는데, 어찌 너만 아니 돌겠다 뻗대느냐.”


2) 그 흐름에 뛰어들었다가, 고수(?)들로부터 세 번의 굴욕을 겼었다. ‘목표’가 있다면 ‘굴욕’은 참을 만한 것이다. 어쭈, 다시 생각해 보니, 이건 새로운 환경의 룰에 적응되고 학습하는 과정이 아닌가. 건풍진 놈! 나는 세 분의 지도를 받아, ‘레인의 경계’ 속으로, ‘울타리 속으로,’ 그 공동체의 질서 속으로 밀어 넣어졌다! 그 ‘자리잡기’의 위상학이 사회적 질서의 관건인 것을...


공자 왈, “三人行 必有師”라 했다. “평범한 사람들 속에 너의 스승이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수영장에서 한 소식, “세 사람이 ‘실천’으로 가르쳤으니, 모두가  스승”이라고 고쳐 읽어보고 슬몃 웃는다.


3) 

그런데 왜 내 어깨가 탈이 난 것일까? 아직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다. 오십견이라고도 하고, 회전근개파열 어쩌고 신문에 난 것도 보았다. 마누님은 노트북 타이핑이 원인이라 하신다. 그럴지도 모른다. 종일 끼고 사는 셈이니.. 그러나, 언제는 아니 그랬나... 그 중심에 심리적 요인이 크다! 최근 몇 가지, 내가 Seinlassen, 사물을 저대로 내려가도록 하지 않고, ‘저항’한 탓이다. 사물과 나 사이에 생긴 틈과 격절이, 그 알력이 어깨의 마비를 불러왔던 것같다. 틀림없다.


“몸의 마비가 기혈의 ‘불통’에서 오듯이, 마음의 마비 또한 심리적 정서적 뭉침에서 온다. 몸과 마음은 서로 얽혀 있어, 마음이 마비되면, 곧 몸의 마비를 불러온다.” 이것이 돌팔이 내 진단이었다. 


조선의 500년을 지배한 주자학이 이 ‘현상’에 주목한 바 있다.


한의학에서 수족의 마비를 불인(不仁)이라고 한다! (*우리의 봄공, 저번, 포스코 중국집에서, 일찌기, 이 유비의 어법에 ‘충격’을 받았다고 고백하신 적이 있다.) 주자는 이 어법이 ‘기가 막히다’고 감탄한다. ‘인(仁)’이란? 그럼... 바로 ‘소통’을 가리킨다. 우리 사회의 가장 핫하고 영원한 이슈가 바로 이 소통 아니던가. 심리적 정서적으로는 ‘공감(empathy)'으로 적절히 번역한다.


주자학의 교과서 <근사록>에 이런 대목이 있다.


醫書言, 手足痿痺謂不仁, 此言最善名狀. 仁者, 以天地萬物爲一體, 莫非己也. 認得爲己, 何所不至. 若不有諸己, 自不與己相干, 如手足不仁, 氣已不貫, 皆不屬己. 故博施濟衆, 乃聖之功用. 仁至難言. 故只曰己欲立而欲人, 己欲達而達人. 能近取譬, 可謂仁之方也已. 欲令如是觀仁. 可以得仁之體.


“의학책에, 수족이 굳고 마비된 것을 ‘불인(不仁)’이라 한다. 이게 저간의 사태를 가장 적실하게 보여준다. 인(仁)이란 천지와 만물을 ‘하나’로 여기는 태도이다! 세상 모든 것이 다 나이다. 모두가 나라면 세상 나와 연관되지 않은 것이 어디 있으랴... 만일 그것들이 나와 격절된다면, 수족의 마비처럼, 기(氣)는 이미 소통되지 않고, 나와는 상관없는 것으로 되고 말 터... 그래서 (백성들에게) 널리 베풀고 가난과 곤고를 구원해주는 것이 ‘성스러운 공적’이라고 하면서도... 인(仁)이 무엇인지는 말하기 어렵다! 다만 ‘내가 서고 싶은 곳에 다른 사람을 세워주고, 내가 갖고 싶은 것을 다른 사람이 갖게 하라’는 생활의 구체적 지침을 내렸을 뿐이다. 이렇게 인(仁)을 이해한다면 인(仁)의 몸체를 얻었다고 하겠다.”


사설이 좀 까다롭다고 느끼겠다. 풀어쓰면 이렇다. 


우리는 ‘본시’ 사물과 서로 소통하고 있다. 자연이 그렇게 되어 있지 아니한가. 감응(感應), 서로 주고받는 상호연관(correlation)의 역동적 총체가 바로 자연이다. 이게 막히면 곧 문제를 일르킨다. 암은 신호를 주고받기에 실패한, 독불장군의 세포들이 만든 반란과 격절의 성채라고 들었다.


그처럼, 우리 마음도, ‘본시’ 타자와 자극에 열려 있는 감응(感應)의 시스템을 갖고 있다. 그런데, 무엇이 지금 그 통로를 막고 있는가.


메카니즘은 차치하고,

그 주범을, 무어라고 부를까... 프롬은 이 원흉에 ‘자기 도취’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다. 기막힌 표현 아닌가.


이 물건의 개인적 사회적 차원을 분석하자면 책 한 권이 필요하다. 어쟀거나 자기 도취의 뿌리는 깊고, 힘은 강력하다. “자기 도취는 성적 욕망이나 생존의 욕망보다 더 강하다.”


쉬운 예를 들면... 자기도취적인 사람은 “쉴 새 없이 말을 한다.” 그리고 비판을 용납하지 않고 분노하거나 의기소침해진다. 자기중심적이기 때문에, 남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도 관심도 없다. 별 것 아닌 말을 장황하게, 매우 중요하다는 듯이 말한다. 특히 노래방에서 마이크를 놓지 않고, 고래고래 소리지르는 사람은 이런 유형일 공산이 크다. ㅋㅋ

이런 농담 하나가 있다. 어떤 작가가 친구를 만나 오랫동안 자신의 신변에 대해 떠든 다음, 생각난 듯, 이렇게 말했다. “내가 너무 내 얘기만 했군. 이제 자네 얘기 좀 하세... 자넨 요즈음 나온 내 책을 어떻게 생각하나?”


자기도취적인 사람은 식사때 먹는 것조차 잊어버리고 떠든다. 앞에 놓인 식사나, 다른 사람은 자신의 ‘자아’보다는 덜 중요한 것이다. (*영호 딸, 주례사때... 40분 동안 밥도 못 먹고 기다린 동기 제위에게... 이 자리를 빌어, 미안한 마음을 전한다.)


그는 합리적 판단을 하기 어렵고 세계상은 비뚤어진다. 모든 것은 ‘나’의 것이거나, 나의 것이기 때문에 가치있다고 생각한다.


이 견고한 ‘환상’과 오래된 ‘벽’을 깨는 것이 삶의 과제이고, 모든 종교와 철학의 목표이다. 이 개인적 자기도취는 곧 집단적으로 전이된다. 인류의 고통과 악은, 지금도 지속되고 있는 그 어둔 구름은 모두 여기서 비롯된 것이다!!


“모든 위대한 휴머니즘적인 종교의 본질적 가르침은 자기 자신의 자기 도취의 극복이 사람의 목표라는 한 문장으로 요약될 수 있다.” 프롬은 불교가 이 원리를 가장 철저하게 보여주고 있다고 말한다. 적절한 지적이다. 그러나 나는 유교 또한 이 원리 위에 서 있다는 것을 잊지 말라 한다.


똑똑한 자공이 물었다. "평생을 끌어안고 살 '한 마디'가 있습니까. "자기도취의  극복(恕)이 아니겠느냐. 네가 바라지 않는 일은... 다른 사람에게 펼치지 마라.(子貢問曰:  「有一言而可以終身行之者乎? 」 子曰:  「其恕乎! 己所不欲, 勿施於人.) 


공자 말했다. "나의 원리는 하나로 관통하고 있다." 모시고 있던 증자가, "예, 그렇지요"하고 대답했다. 공자 나가고 나서, 문인들이 "무슨 소립니까."라고 묻자 증자가 부연했다. "스승의 도는 '자기 도취'의 철저한 극복(忠恕)'에 있다. 子曰:  「參乎! 吾道一以貫之. 」 曾子曰:  「唯. 」 子出. 門人問曰:  「何謂也? 」 曾子曰:  「夫子之道, 忠恕而已矣.


서(恕)란 공자 사유의 키워드이다. 글자 그대로 보자면, "타인이 나와 같은(如) 마음(心)을 갖고 있다는 것을 화들짝, '자각'하는 것"이다. 자기 도취에 빠진 사람, 자신의 감옥에 갇혀 있는 사람은 이 '건넴'이 불가능하다. 


각자의 나날을 체크해 보시면 어떨까. 


허나, 아시겠지만, 자기도취가

완전히 없어지기는 어렵다. 다만 사회적으로 용인되고, 창조적으로 순화되는 수준으로 완화되는 것이 성숙의 목표인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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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설, 엉뚱한 사설이 장황했다. 


일주일, 수영장에서 열심히 푸덕거린 덕에, 어깨 80%는 풀린 것같다. 나머지는 근육이 될지 모른다. 플러스... 그게 어디 수영만의 공덕이리... 마음의 사재(渣滓)를 흔들지 않고, 평상의 평정이 자리잡으면서 생긴 효과가 아닐 터인가. 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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