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경남고 31회 동기회

경남고등학교 제31회 동기회

수봉산 홍련암

2007.08.31 15:27

김옥운 조회 수:608

 

수봉산(首鳳山) 홍련암

명산엔 명인이 있다

동양화의 주제는 항상 명산과 대천의 절경들이다. 물이 졸졸 흐르는 계곡과 기암괴석의 절벽에는 1,000년이 넘는 소나무가 자라고 그 위에는 하얀 자태의 학이 앉아있게 마련이다. 어떤 그림을 보나 산수가 안 들어간 그림이 없다. 다른 것도 좀 그리지, 어째서 동양의 화가들은 그림을 그릴 때 이처럼 산수화만을 고집했는가?

 한.중.일을 비롯한 한자 문화권의 문인과 관료들, 그러니까 동양의 지식층들이 추구하던 인생의 궁극적 가치는 대자연과 자기의 합일이다. 분리가 아니라 합일이다. 대자연에다 자기의 에고(ego)를 합침으로써 영원한 생명과 자유, 평화를 얻는다고 믿었다. 그래서 항상 산을 동경하였다.

 산이 너무 좋은 사람은 프로가 된다. 머리를 깎고 숭려가 되거나 도사가 되는 것이다. 그러면 산에서 한평생을 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뿌려놓은 인연이 많아서 세속에서 살 수밖에 없는 사람들, 처자식을 부양하고 생업에 종사해야만 하는 사람들은 산에 자주 갈 수 없었다. 대신에 그림을 그려 놓고 대리만족을 느꼈던 것이다. 산천에 대한 회귀, 대자연과의 합일, 이것이 동양 식자층의 구원관이었고, 그 구원을 간접적으로나마 충족하는 수단이 산수화였다.

 동양화(한국화)를 볼 때 유심히 볼 대목이 하나 있다. 바로 사람이다. 웅대한 산수 속에는 반드시 사람이 조그맣게 그려져 있다. 사람이 없으면 그림이 완성되지 않는다. 산수도 중요하지만 사람도 중요하다. 산천이 객관이라면 사람은 주관이다. 주관이 없는 객관은 성립될 수 없다. '일이이(一而二)'인 것이다. 산천과 사람, 주관과 객관은 하나이면서도 또한 둘인 법. 전국의 수많은 명산과 사찰을 둘러보러 다니면서 어느 순간엔가 그 산에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산수화에 보일 듯 말 듯 작긴 하지만, 반드시 사람을 그려 놓은 의도를 비로소 이해했다고나 할까.

 명산에는 명인이 있어야 감칠 맛이 난다. 그렇다면 명인이란 한마디로 어떤 사람인가? '자유인' 아니겠는가! 가을바람에 순채와 농어회를 생각하여 선뜻 멀리 떠나 버리는 사람이 아니겠는가! 진나라 때 장 한(張 翰)이 낙양에 들어가 벼슬을 하다가 가을바람이 이는 것을 보고는, 자기 고향인 오나라의 순채국과 농어회가 생각나 "인생은 자기의 뜻에 맞게 사는 것이 귀중하다"라고 말한 뒤 당장에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한다.

 완주군 비봉면 내월리 홍련암의 대선선사(1904~)를 찾은 이유는 사람이 그리워서이다. 둥그렇게 잘 생긴 모습이 뭉친 수봉산 아래의 홍련암. 봉황새가 알을 품고 있다는 명당의 터에 옥토끼가 달을 보는 형국이다. 내월리는 주변에 암산, 즉 살기(殺氣)가 보이지 않고, 수봉산의 청룡 백호 자락에 둘러싸여 있어 소음이 들리지 않는 터이다. 비승비속, 비산비야의 내월리에 정갈하게 자리잡은 홍련암. 덕지덕지한 치장이 없어서 좋다.

 7월의 홍련암은 지극히 동양적인 격조가 어우러져 있다. 홍련, 청죽, 오동 그리고 한가하게 앉아있는 대선 선사의 모습이 어우러져 한 폭의 탈속한 그림을 보여주고 있다. 그대로가 그림이다. 암자 앞 연못에는 수백송이의 홍련이 만발해 있고, 뒤에는 청죽이 푸른 목기를 내뿜고 있는가 하면, 뜰에는 한 그루 벽오동이 봉황을 기다리고 있다. 그 고즈넉한 풍경을 푸른 눈의 선승이 대청에 앉아서 무심히 바라보고 있다. 밤이 되면 수봉산 너머로 떠오르는 달을 본다. 보통의 달이 아닌 내월리 월곡의 유명한 달이다. 내월리 월곡은 선사의 고향이기도 하지만, 그는 밤에 떠오르는 월곡의달이 좋아서 이곳을 떠나지 못하고 있다. 먹고 살기 바쁜 세간의 중생들아, 달의 정취를 아는가!

 나는 스님과 도사를 만날 때 마다 두상의 형태, 눈동자 , 목소리 등을 살펴본다. 대선 선사의 얼굴과 두상은 둥그렇고 입체적이다. 앞에서 보나 옆에서 보나 죽은 데 없이 잘생겼다. 앞면만 잘생기고 옆이나 뒤가 편편하면 속인의 상호이지만, 도인들일수록 옆과 꼭뒤가 통통하게 튀어나와 있는 법이다. 두상이 둥그렇고 커야 도인의 상호이다.

외람됨을 무릅쓰고 선사의 눈을 자세히 살펴본다. 약간 푸른 빛이 도는 독특한 안광이다. 내가 이제까지 만나본 도인 중에서 가장 강렬한 눈빛을 지닌 분이다. 선사는 사람을 대할 때 상대방의 눈빛을 정면으로 강렬하게 직시하므로 어지간한 사람은 그 눈빛을 정면으로 받기가 힘들 것 같다. 그러나 강렬하다고 꼭 좋은 것은 아니다. 강렬한 눈빛은 자존심과 에고가 강하다는 것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선사의 눈빛은 펄펄 끓는 용광로에 한번 들어갔다 나온 눈빛이다.보통 강렬한 눈빛이 아닌 것이다. 용광로에 들어가 잡철을 떼어 버리고 순금만 정제되어 나온 눈이라고 판단하였다. 다른 사람이 가보지 않은 세계, 즉 종교적 체험을 한 사람의 눈빛인 것이다. 그래서 맑다. 강렬하면서 맑아야 일급이다.

 선사의 목소리는 어떤지 들어보자. '관상이 불여음상(관상이 목소리만큼 정확하지 못하다)'라는 말이 있다. 관상이 표층의 상징이라면 음상은 심층의 울림이다. 목소리는 그 사람 오장육부의 공명을 타고 나오므로, 목소리를 알면 그 사람의 오장육부를 안다고 할 수 있다고 한다. 오장육부의 크고 작음에 따라서 성격과 기질이 각기 다르다. 그래서 목소리는 아주 중요하다. 관상은 좋은데 목소리가 시원치 않으면 문제가 있다. 옛 사람들은 사람을 보지 않고 문지방 너머로그 사람의 목소리만 들어도 그 사람을 알 수 있다 하였다. 목소리만 듣고 그 사람을 아는 경지, 이것을 지음(知音)이라 한다. 선사의 목소리는 텁텁하다. 뚝배기에 담긴 막걸리 냄새가 난다. 눈빛의 형형함과는 다소 차이가 있는 목소리이다. 곧은 성품이 밴 목소리이자, 서민의 목소리이다. 이 텁텁함이 사람을 포용할 것 같다.

 스님은 열아홉 되던 해에 출가하여 계룡산 갑사에 든 때가 1958년이었다. 여기서 10년 살았다. 그 다음에 북한산 망월사에서 10년을, 해인사에서 10년을 살았다. 갑사 위쪽의 북사자암에서 3년 동안 불 안땐 방에서 온몸이 언 채로 화두를 잡고 참선에 열중한 뒤에, 서울의 도봉산에 있는 망월사에서는 3,000일 동안 솔잎, 쌀까루, 콩가루 만으로 생식을 하였다. 그가 이제까지 그 흔한 감기 한번, 잔병치레 한번 앓은 적이 없이 기운찬 건강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은 다 그때의 생식 덕분이라 한다. 망월사에서 무애도인으로 유명한 춘성(春城)스님을 시봉한 뒤, 대중처소를 원해 해인사에 머물렀다.

 

큰아들아!! 아빠의 이 '염화미소' 같은 웃음 뒤에는 뭐가 있을 지 한번만이라도 생각해줄래??

 

선문답

선사의 매력은 어디에 있는가? 단순함에 있다. 군더더기 없는 단순함이 이야기를 나누는 상대에게 어떤 때는 편안함을 주다가 또 어떤 때는 엄청난 부담으로 작용한다. 선을 많이 한 스님일수록 단순하다. 배고프면 밥먹고, 잠이 오면 자고, 일 없으면 앉아서 가만히 있다. 혼자 있을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선승이다. 고독이 가능하다고나 할까. 대선 선사는 처절한 고독이 배어있는 그런 사람인 것 같다. "스님이 좋아하는 경전은 무엇입니까?" 하고 어설픈 질문을 던졌다. "별로 없어" "평소 존경하는 분은 어떤 분입니까?" "별로 없어" "좋아하시는 선구(禪句)가 혹시 있습니까?" "별로 생각이 안나네."

 이런 식으로 이야기가 진행되면 묻는 사람이 할 말이 없어진다. 별볼일 없는 질문만 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질문하는 사람의 수준이 낮으면 대화가 어렵다는 법칙은 여기에서도 역시 적용된다. 양쪽 수준이 비슷해야 주거니 받거니 하는데, '주거니'가 안되니까 '받거니'도 진행되지 않는다. 그런다고 인사치레 또는 상대방의 입장을 생각해서 하는 의례적인 발언도 전혀 없다. 일체 생략이다. 그럴 때는 한참 침묵이 흐른다. 어떤 때는 마주 앉은 둘 사이에 침묵이 10분 넘게 흐를 때도 있다. 침묵이 방문자를 갉아먹는다. 이 어색한 침묵을 견디지 못해서 쓸데없는 이야기를 먼저 꺼내는 쪽이 하수로 전락하게 마련이다. 고수들은 침묵을 단전으로 쿨컥쿨컥 삼키지만, 하수들에게는 그 침묵이 천근의 무게가 되어 자신을 짓눌러온다. 시간이 흐를수록 괜히 위축된다. 고로 하수들은 침묵에 약하다고 교과서에 써있다.

 나는 침묵의 난국을 타개하기 위하여 하수로 전락하는 줄 뻔히 알면서도 이야기를 꺼낼 수밖에 없었다. "화두는 어떤 화두를 들어야 합니까?" "무(無)자이지." "'이 뭐꼬' 화두에 비해서 무 자는 어떻습니까?" "'이 뭐꼬'는 아무래도 무슨 건더기가 남는 경우가 많지. 잘못하면 상기되기도 쉽고. 그런데 무 자는 아주 시원해. 조선생도 무 자를 들어봐." "화두는 역시 무 자이구먼요?" "암 그렇지, 그렇고 말고. 본무일물(本無一物, 원래 한 물건도 없다)이라는 것을 항상 명심해야 해." 무와 본무일물, 이것이 대선 스님의 삶을 관통해 온 화두였던 것이다. 무의 정신이 선사의 삶을 그토록 자유롭게 만들었던 것일까?

 대선 스님은 어렸을 때 신동이라는 소리를 들었다.일곱 살 때 천자문을 뗄 정도였다. 이 곳 내월리의 마을 어른들은 스님의 어릴 적 모습을 '세상에서 더 배울 것이 없는 천재'로 기억한다.높은 지능지수에다가 저돌적인 기백까지 갖추었던 것이다. 그의 눈빛과 목소리는 어떤 사람에게도 쉽게 굴복하지 않을 불굴의 기백을 담고 있다. 이를테면 지성과 야성을 겸비했다고나 할까. 선승으로서는 안성맞춤의 자질이다. 중학교 1학년 때 '금강경' 서문에 매료되어 불교를 접하고, 열아홉 살에 계룡산 갑사의 혜원 스님을 은사로 출가하게 된다.

 혜원은 수덕사 만공 스님(1871~1946)의 제자로서, 스승인 만공을 끔찍이도 섬겼다. 스승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갖는 가풍이 수덕사 가풍이다. 혜원 스님은 기골이 장대하고 좀처럼 자기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속이 깊은 어른이었다. 전형적인 태음인 체질이었다. 헌 집 벽 털 듯이 털어 버리려고 덤벼드는 대선의 기질을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분이었다. 포용적인 스승과 저돌적인 제자의 궁합이 맞았던 것이다. 스승과 제자도 이처럼 기질이 맞아야 오래간다. 한국의 계룡산이 어떤 산인가? 수많은 도인들과 술객들의 본향이 아니던가! 대선은 20 대를 계룡산 북사자암에서 공부하면서 기라성 같은 이 땅의 도인들과 신령스런 술객들을 접하면서 안목을 넓힌다. 초발심이 빛나던 그때 스님은 계룡산 봉우리 하나 오르지 못했다. 산속에는 도인이나 산신령이 꽉 들어차 있는 듯해서였다. 아울러 '무'자 화두를 가슴에 품고서 치열하게 구도정진한다. 대선 스님은 직접적으로 언급하진 않지만, 필자의 추측으로는 계룡산 시절에 스님은 '한 소식' 경험하지 않았나 싶다.

 

고박 아들내미와 이름이 똑같은 작은아들아,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가 요샌 "여럿이 힘을 합치면 불가능이 없다"란 뜻이라며...

 

스승을 보면 제자를 안다

그는 이 체험을 기반으로 전국의 선방을 순례하였다. 당대의 내노라하는 강호의 고수들과 일합씩을 겨뤄보기 위해서였다. 이 산 저 산의 고수들과 진검 승부를 거칠 때 자신의 허실이 드러나고 진짜 실력이 배양되는 법. 그 와중에 또 다른 스승도 만나게 마련이다. 또 다른 스승은 도봉산 망월사의 춘성 스님(1891~1977)이었다. 춘성당이 누구인가? 천하의 걸림없는 무애도인 아니던가! 대선은 바로 춘성 스님을 모시고 10년을 생활한다.

 나는 근래에 가장 통쾌하게 살다 간 분이 춘성 스님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 분의 무애행은 유명하다. 그 야성의 춘성을 10년이나 모셨다면 그분의 일화를 많이 알고 있을 것 같아 질문을 드렸다. "춘성 스님 이야기나 좀 해주시죠?" 스승의 이야기를 해달라는 대목에 이르자 대선 스님은 비로소 말문이 열린 듯이 목소리에 힘을 준다. "춘성 스님은 수행에 철저하신 분이었어. 대체로 나이가 들면 체력이 약해져서 몇 시간씩 앉아 있는 좌선을 생략하는 수가 많은데, 춘성당은 여든이 넘어서도 대중과 똑같이 좌선 정진하셨지. 그 점이 참 배울만 해." "춘성 스님은 돈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였습니까?" "그 분은 돈을 몰랐지. 신도가 당신 용돈을 쓰라고 갖다 주면 꼭 주머니에 넣고 계셨어. 그러다가 누가 돈이 필요하다고 하면 주머니의 돈을 그대로 꺼내서 주셨어. 돈을 줄 때도 세어본 적이 없지. 잡히는 대로 주었어. 춘성 스님에게 돈의 종착지는 주머니였어. 돈이 통장으로 가거나 서랍으로 들어간 적이 없어." "춘성 스님은 욕 잘하기로 유명한데, 그 대목 좀 이야기해 주시지요?" "한번은 망월사 법당을 짓느라고 소나무를 좀 베어 냈지. 아, 그런데 그 소나무 베어낸 것이 산림법 위반에 해당되어 스님이 고발을 당했지. 그래서 검사 앞에서 조서를 받게 되었는데, 검사가 물었어. '스님 본적이 어딥니까?' '우리 아버지 자지 끝터리.' '스님 출생지가 어딥니까?' '우리 어머니 보지다.' 이 말을 들은 검사는 얼굴이 하얘져서 그만 스님을 돌려보낸 일이 있지."

 스승을 보면 제자를 알고, 제자를 보면 스승을 안다. 사자굴에서 원숭이 그림자를 찾을 수 없고, 코끼리 다니는 길에서 여우 발자국을 찾을 수 없듯이. 이러한 춘성 밑에서 선기를 단련받은 대선 스님이니 그 스케일과 품격을 짐작할 만하다.

 홍련암을 뒤로 하고 대선 선사가 정진 끝에 '한 소식' 깨달을 때 쓴 시를 읊조리면서 발길을 옮겼다.

 

계룡산 찾아갈 제 걸음걸음 눈물이라.

3년을 하루같이 명산을 바라보며 스님을 시봉했네.

도봉산 돌고 돌아 높디높은 춘성 선사.

10년 동안 그 밑에서 마음 달을 희롱하며 모든 것을 남김없이 모두 다 바치었네.

1,000년 전 원효 성사 터 좋다고 찬탄한 곳 천진하신 도천 선사 오래오래 머무신 곳.

그 속에서 무심으로 무자탑을 갈고 갈며 눈 덮힌 대둔산에 원만한 보름달이 중천에 솟았더라.

 

그 이름도 유명한 합천의 해인사에 팔만장경 맴돌면서 3년을 소일했네. 지나간 20여년 허송세월 생각하면 후회막급이지만은 그래도 불법만나 정법 속에 뛰어들어 눈 밝은 명안 종사 훈훈한 휘하에서 산 정신을 고이고이 뼛속 깊이 간직했네. 이제라도 슬금슬금 부지런히 닦아 가면 머지 않아 타성일편 나타나서 패침망찬할 지경에 활연히 깨달아서, 일없는 대선당이 배고프면 밥을 먹고 졸리면 잠을 자며 일체처 일체경에 하나도 걸림없이. 어릴 적 그때처럼 기탄없이 발까벗고 어화둥둥 춤을 추며 태평가를 부를걸세. 어화둥둥 달동네의 복많은 보살들아 언제부터 닦았기에 그리도 잘하는가. 요덕사(堯德寺) 번성할 때 큰스님 모셔 놓고 설법 듣던 보살들아 아 아 다시 묻지 않아도 삼생 인연이 분명하구나.

 

이 글은 지난 18년여를 한.중.일 3국의 약 6000여개의 사찰과 고택을 현장답사한 후 이 이야깃 거리로 '강호동양학'이라는 장르를 개척허고 있는 중인 '조용헌'의 "사찰기행"이라는 책에서...

 

'동양화의 산수 속에는 사람이 항상 조그맣게 그려져 있고, 사람이 없으면 그림이 완성되지 않는다'는 말이 제일 가슴 속에...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