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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고 31회 동기회

경남고등학교 제31회 동기회

고영호

박변!

한형조 도사님께서 이번 토요일 부산을 방문하신다는데...

벙개 모임 한번 주선하셔서 한 도사님께 좋은 가르침들 좀 받게 해주시지요?

소생은 토욜저녁에 결혼식이 있어 참석이 곤란해 너무 안타깝습니다.

 

 

한형조 교수에게서 듣는‘유학에 대한 오해와 진실’

한형조 교수는 “소크라테스는 ‘음미되지 않는 인생’이란 용어를 썼다. 음미된다는 건 자기 존재를 성찰하는 거다. 존재에 대한 성찰, 그 훈련법이 유학에 풍부하게 담겨 있다”고 말했다.
지구촌에 ‘새로운 유학(儒學)’ 바람이 불고 있다. 미국 보스턴 지역을 중심으로 생겨난 ‘보스턴 콘퓨셔니즘(Boston Confucianism)’ 그룹은 고전으로만 통하던 유학을 21세기에 접목하며 새로운 흐름을 일구고 있다. 하버드대 동아시아학과 두웨이밍(杜維明) 교수 등 구미 유학자들이 그 선두에 서있다. 중국과 대만에선 이들을 가리켜 ‘현대 신유가(新儒家)’라고 부른다. 미국뿐만 아니다. 중국에서도 쇠퇴해가는 사회주의 이데올로기를 대체할 생활철학으로 이미 ‘유학’을 꼽고 있다. 공자 묘의 비석을 잘랐던 문화대혁명 때를 돌아보면 격세지감이다. 더욱이 중국에서 유학의 부활 속도는 빠르다. 중국의 초등학생들이 『논어』를 달달 외우고, 논어와 공자, 그리고 21세기에 관한 책들이 베스트셀러 목록에 수시로 올라간다.

이유는 뭘까. 우리에겐 ‘당파싸움’ ‘탁상공론’ ‘고리타분’ ‘엄격한 예법’의 지루한 이미지로만 남아 있는 유교(유학)가 왜 ‘21세기의 키워드’ 중 하나로 떠오른 걸까. 27일 경기도 분당의 한국학중앙연구원(원장 김정배)을 찾아가 한형조(51) 교수를 만났다. 일요판 신문 중앙선데이에 ‘한형조 교수의 교과서 밖 조선 유학’을 연재 중인 그는 ‘유학의 고수이자 파격’으로 통한다. 한 교수에게 ‘유학과 21세기’를 물었다.

- 유교(유학)가 뭔가.

“제가 보기에 유교는 ‘심학(心學)’이다. 다시 말해 ‘마음의 훈련에 관한 학문’이다.”

- 뜻밖의 대답이다.

“그럴 거다. 사람들은 ‘유교’하면 당파싸움이나 사회적 에티켓인 예법(禮法)만 떠올린다. 우리의 시야에는 그런 것만 남아 있기 때문이다.”

- 왜 그런가.

“일제 강점기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첫째는 일제가 조선문명에 대한 부정적 시각을 강조했고, 둘째는 조선의 지식인들 스스로 망국에 대한 자괴감과 열패감을 조선 유교에서 찾다 보니 그랬다.”

- 다들 그걸 유교로 알고 있다.

“아니다. 유교의 핵심은 ‘심학’이다. 공자 때부터 나오는 강령이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다. 그걸 줄이면 ‘수기치인(修己治人)’이다. 결국 자기 자신부터 닦는 거다. 스스로에 대한 훈련, 자신에 대한 정화가 없이는 어떠한 사회적 관계나 행동도 공허한 거다. 그건 뿌리 없는 나무와 같은 거다.”

- 그래도 유교는 ‘엄격한 예법’을 강조하지 않나.

“맞다. 그러나 예법(예학)은 본래 격식이나 형식이 아니었다. 그건 유교의 수행법이었다. 퇴계·율곡 등의 주자학자들은 마음의 훈련과 몸의 훈련을 병행했다. 예법은 뻣뻣하지 않았다. 세종대왕도 나라의 상(喪)을 당하자 ‘3년상은 너무 길다’며 편의에 맞게 몇 달로 줄였다. 그렇게 유연했다. 그런데 나중에 유교가 박제가 되면서 알맹이는 빠져버리고, 바깥의 예의절목과 규칙만 고집하게 됐다.”

- 그렇게 변한 시대적 배경이 있나.

“전쟁이 이유였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며 사회적 각성이 생겼다. 평화시의 예(禮)를 충분히 실현하지 못한다는 생각이 널리 퍼졌다. 그러자 기득권 강화를 위해 지배층에선 예학을 더욱 강조했다. 18세기 연암 박지원의 글을 보면 여염집 아낙네도 남편이 죽으면 따라 죽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들은 조선사회에서 열녀가 됐다. 본래의 의미를 잃은 예법이 이데올로기로 변한 거다.”

- 예법이 수행법이라니. 구체적으로 말해 달라.

“유교에선 우주 마음의 중심이 ‘인(仁)’이다. 공자와 맹자 시대에는 타인에 대한 배려·교감·소통 등을 뜻했다. 그런데 주자학에 와선 봄의 탄생, 여름의 성장, 가을의 결실, 겨울의 예비까지를 우주가 사물과 생명에게 베푸는 일관된 인의 배려라고 봤다. 그건 불교의 자비, 기독교의 사랑과도 통한다.”

- 선비들은 생활 속에서 어찌 수행했나.

“새벽에 닭이 울면 깼다. 깨면 이런저런 생각이 일기 시작한다. 그리고 잠자리에서 일어나 가부좌를 했다. 몸을 가다듬어서 마음을 떠오르는 해처럼 밝게 가지려 했다. 낮에는 일이 생기고 처리되고, 다시 생기고 처리되기를 흔들림 없이 고요하게, 동(動)과 정(靜)이 순환하듯이 했다. 그리고 밤에는 피곤과 혼탁한 기운이 엄습하기 쉬우니 마음을 가다듬은 뒤, 다른 생각을 곱씹지 않고 마음과 몸을 잠자리로 돌렸다.”

- 21세기에 왜 유학인가.

“유학에는 ‘궁수가 과녁을 맞히지 못하면 스스로를 돌아보지 과녁을 탓하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현대인은 일상에서 자신과 타인, 또 세상과 수시로 충돌한다. 삶의 행복도 느끼지 못한다. 유학은 그런 문제의 원인과 열쇠가 자기 속에 있음을 일깨워준다. 그래서 성찰과 자기 훈련이 필요하다. 이런 훈련의 기초가 유학에는 아주 풍부하게 녹아 있다.”

- 앞으로 유학은 어떤 건가.

“이젠 유학도 역사적 경험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역사 속의 모든 혁신과 르네상스, 루터의 종교개혁도 과거적 자원의 탈피가 아니라 철저화에서 일어났다. 이젠 유학을 식민지 시대의 역사나 유림을 떠나 다시 성찰할 필요가 있다.”

글·사진=백성호 기자 <script src="http://news.joins.com/_include/javascript/set_article_section_link.js" type="text/javascript"></scri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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