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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고 31회 동기회

경남고등학교 제31회 동기회


4. 


몇 십년 뒤 시인 하나가 나타나 이 화려한 사랑과 슬픈 이별의 사연을 서사시로 읊었습니다. 천하의 절창으로 두고두고 회자되는 백거이(白居易: 호는 樂天)의 「장한가(長恨歌)」가 그것입니다. 제목은 “다하지 않는(長) 그리움의(恨) 노래(歌)”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임금은 미인에 취해 나라까지 버릴 듯

오래 두고 찾았으나 진짜는 못 얻었지.

양(楊)씨네집 여자 있어

깊고 깊은 규방에서 남모르게 피었나니

하늘이 준 아름다움과 그 향기는 못 버려

하루 아침 임금에게 그 향기 날아갔네

눈웃음 스치면 온갖 애교 피어나고

뭇계집들 치장해도 이 꽃앞엔 소용없어


꽃샘바람 볼 맞으며 청화지(淸華池)에 목욕가네

온천의 물 옥같은 속살에 빛나고

시중아이 부축받아 나른한듯 그 교태여

처음으로 임금 마음에 불을 당겨 놓았네


구름같은 귀밑머리 꽃같은 얼굴에 패옥이 흔들리는 소리

연꽃 수놓은 장막 속에 봄밤이 흐르는데

봄날 밤은 너무 짧아 어느새 중천이라

임금은 아침 조회 아예 치워버렸다네


이 미인 한시도 임금곁을 떠나지 않고

봄이 오면 봄을 찾아, 밤에는 또 어김없이 사랑을 불태우니

궁중의 그 많은 여자들은 이 꽃내음에 묻혀버렸어라

금빛 부셔라, 온갖 교태로 밤을 헤엄치누나

술자리 파한 누각에는 취기가 봄빛에 녹아들고


양씨네 식솔들 모두 높은 자리 하나씩

아! 계집아이 하나가 가문을 빛냈으니

이때부터 사람들이 하는 말,

사내아이 낳기보다 계집 낳기 힘쓸진저


구름이 엉켜 도는 드높은 별궁

바람에 나부끼는 음악소리 꿈꾸듯 들려오네

흐르는 고운 노래, 느린 춤 위에 피리와 가얏고 흐드러지고

왼종일 듣고 보아도 다시 보고 듣고지고


이때 어양(漁陽)의 북소리 천지를 뒤흔들고 들이닥쳐

노래는 깨어지고 춤사위는 흩어졌네

구중궁궐 깊은 곳에 반란군의 말굽소리

수많은 수레와 기마가 서남쪽을 향해 떠나는데

바람에 펄럭이는 임금의 깃발, 가다가 멈추곤 하는 피난길 행렬

서쪽문 나와 백여리 마외(馬嵬)에 다다르자

움직이지 않는 신하들, 병사들의 외침소리, ‘양귀비를 죽이소서’

아아! 그 아리땁던 아미 말발굽 앞에서 져 갔도다

땅에 떨어진 꽃비녀 거두어 주는 자 없고

금목걸이 은팔찌며 물총새깃 머리장식이여

임금도 어찌할 수 없어

피눈물로 범벅된 얼굴 소매로 훔쳐낼 뿐


흙바람만 쓸쓸히 불어오고 가는 곳

구름다리 바위길을 구비구비 오르나니

아미산 아래 사람의 흔적 끊어지고

깃발은 지는 햇빛 받아 저무는구나


강은 강대로 푸르고 산 또한 그렇건만

임금의 가슴 속에 밤낮없는 그리움

피난지 궁성의 달을 보매 눈가가 젖어오고(*行宮見月傷心色)

밤비 속에 방울소리 애간장을 파고드네(*夜雨聞鈴腸斷聲)


말발굽 소리 잦아들고 새날이 와 멀머리를 돌릴 적에

바로 그 자리 머뭇머뭇 차마 발길 안 떨어져

마외 언덕 아래 진흙벌 구비구비

아아! 그대 모습 어디 가고 빈 바람뿐이구나

임금과 신하 서로 보며 옷깃 적시우나니

말 위에 몸을 싣고 서울 향해 터벅터벅


돌아오니 그때  놀던 연못은 옛 그대로이고

연못에 연꽃 버들 무심히 늘어졌는데

연꽃은 그대 얼굴, 버들언덕은 그대 눈썹

왈칵 쏟아지는 눈물을 어찌할꼬


봄바람에 복숭아꽃 피는 밤

가을비에 오동잎 질 때(*秋雨梧桐葉落時)

궁성 이곳 저곳에 마구잡이 자라는 풀

가을 붉은 낙엽으로 뒹굴어도 쓸고 싶지 않구나

가무단 애띤 소년들의 얼굴에 백발이 지나갔고

꽃다운 그 목소리 주름살로 잠겼구나


한밤 날아다니는 반딧불에 쓸쓸한 심사

외로운 등불 다 타도록 잠들수가 없네

더딘 인경소리에 밤이 긴 줄 알았고

초롱초롱한 은하수 날이 새려 하는구나

차디찬 기와에 내린 무거운 서리

싸늘한 이불 속에 누구와 잠들거나

생사가 갈린 지 여러 해가 흘렀건만

애달파라! 그대 영혼은 꿈길조차 찾아오지 않는구나  - 白樂天, <長恨歌>


전체 120행 가운데 74행만 소개해드렸습니다. 후반부는 황제가 저세상에 있는 미인의 혼을 만나 영원의 슬픈 사랑을 확인하는 장면을 읊고 있습니다. 그 끝은 이렇습니다. “하늘과 땅이야 다하는 날이 있겠지만 우리들의 못다한 그리움은 영원하리라(天長地久有時盡, 此恨綿綿無絶期)”


양귀비3.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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