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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고 31회 동기회

경남고등학교 제31회 동기회


3.

미인의 치마폭에서 황제는 제국을 통치해야하는 자신의 무거운 책무를 점점 잊어갔습니다. 외척의 발로를 막고 제국의 중건을 꾀하며 등극했던 탁월한 군주 명황(明皇)의 치세(治世)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했습니다. 경제적 토대가 무너지고 이와 함께 군사적 질서가 문란해 지기 시작했습니다. 까까머리 교과서에는 이를 “균전제(均田制)가 무너지고 부병제(附兵制)가 흔들렸다”는 식으로 표현하고 있을 것입니다. 중앙의 통제력이 약화되고 변방의 용병 절도사들이 세력을 키우기 시작했습니다. 그 중에서도 타타르족 출신의 장수 안록산(安祿山)이 가장 강력했습니다. 몸집은 비대하고 배가 씨름선수처럼 나왔다고 전하는데, 하루는 황제가 “이 배 속에 대체 무엇이 들어있나”고 묻자, “임금님을 향한 일편단심의 충성심이 들어있습니다”라고 했답니다. 타고난 아부꾼으로서 그는 미인의 마음에 들기 위해 차마 낯뜨거운 짓까지 서슴지 않았습니다. 아예 미인의 양자를 자청했는가 하면, 인사를 드릴 때도 황제보다 미인에게 먼저 절을 올릴 정도였습니다. 황제가 이의를 제기하자, “오랑캐 풍습으로는 어머니가 우선이고 아버지가 다음입니다”하고 태연하게 대답했답니다.


이 안록산이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역사는 그것이 재상인 미인의 친정오빠와 의견이 엇갈려서였다고 적고 있으나 저는 미인에 대한 사랑이 난을 일으키는 커다란 동기가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공식적이고 허울뿐인 어머니와 아들 사이(?)가 아니라 당당히 미인을 차지해보겠다는 욕망이 당 제국을 피로 물들였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루이 14세 시절 터어키족이 베르사이유 궁전을 불지르고 약탈하듯이 장안의 궁전들은 잿더미가 되었습니다. 7년에 걸친 난리로 죽은 사람이 3,600만명이었다고 기록은 전하고 있습니다. 이백과 두보를 위시하여 가장 뛰어난 시인들의 작품이 이 전란의 고통과 슬픔 속에서 태어났습니다.


난리가 나자 황제는 미인을 데리고 서남의 촉(蜀)땅, 지금의 사천지방 그 험한 곳으로 피난을 떠났습니다. 장안을 떠난 지 백여리 마외(馬嵬)라는 언덕에서 신하들과 군사들의 분노와 원망이 폭발했습니다. 총명한 황제의 혼을 빼앗아 정사를 돌아보지 않게 했고, 친정의 건달떨거지들에게 국정을 맡겨 이 난리를 겪게 했다는 생각에 모두들 “미인을 죽이라”고 외쳤습니다. 황제도 이 거센 기류를 잠재울 수 없었습니다. 하여 미인은 황제의 울부짖음 속에서 가을 바람 속의 한 떨기 붉은 꽃으로 지고 말았습니다. 삶의 의미를 잃은 황제는 제위를 내놓고 피난지에서 시름과 그리움으로 지새다가, 난이 평정되어 장안으로 되돌아온지 몇달 만에 미인의 뒤를 따라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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