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안여행 2차.....
2011.05.18 12:10
뭐 딱히 장황한 설명은 필요없고 사진으로 대신 할께요.
역사를 잘 몰라스리......
아래사진은 려산에서 내려다본 화청지모습
화청지는 양귀비와 당현종이 온천을 즐기며 놀던 장소임
화청지에서 사진기 밥이없어서 사진없슴.........
병마용과 친구해서 한 컷
병마용 내부 이미 너무나도 잘알려진 장소로 그크기가~~~~ 이것도 20% 발굴한건데 다하면.....
한릉.....역시 1/8 정도 발굴한 상태로 중단되어있슴. 진의 릉보다는 1/3정도로 해라는 한고조 유비의 유언에 따라 조그마한릉
그러나 역시 엄청크다. 우리나라 릉하고는 비교가 안된다.
릉안에 있는 조각들 작아보인다. 근데 여기는 옷을 입혔는데 옷들이 전부 썩고 없어져 저런 상태로 출토됨.
태자묘의 벽화....좀 익숙한 그림이다.
측천무후를 흉보았다는 이유로......
당고조의 건릉...한마디로 기가 질리더군..........
부처님의 손가락 사리가 모셔져있는 법문사......
나는 절이 이렇게 클 수있구나 하는걸 여기서 느꼈다
나름 그 크기를 나타내려 했는데 사진으로 쉽지 않더라
사진 잘 보면 사람들 크기가 보이니 한 번 보시게나.
이게 부처님 손가락 사리이니 잘 보시고 축원들 하시게나.
이게 삼장법사가 손오공을 부리던 바로 그 지팡이다.
법문사 내부 풍경
화산으로 갑니다.....무협지에 자주 나오는 바로 그 화산파의 고향
근데 올라가는 사람이 이렇게 많다. 2시간을 기다려 삭도를 타고 올라감
근데 황산보다는 별로 인것 같아.
완전히 돌산인 화산 한 번 보시게.
서봉가는길에 올라가야하는 돌길....
저아래 걸어 다니는 길이 보인다.
저걸 이용하면 발목과 무릎이 걱정된다.
참 중국에서 등산한다고 산 밑에서 정성까지 가면 발에 무리 옵니다.
전부 시멘트나 돌길입니다. 흙은 전혀없으니 하지 마시길.....
시내에 있는 대안탑과 소안탑임
마지막으로 성벽에 올라 자전거로 한 바퀴돌고 주하이로 돌아옵니다.
성벽위의 모습.....4차선은 만들겠더군
그리고 성문은 이중구조라 들어와도 독안에든쥐 형상.......
댓글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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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수교
2011.05.18 13:31
-
서동균
2011.05.18 13:53
D A T E
P L A C E
T R A N 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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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도착……안녕히 가십시오!
일정 대령이요~~~~
요금은 국적기+짱께기는 비싸니,,짱께기로 하면,,,
8월이면 pp 당 w 1,000,000 + @ 쪼메이..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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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수교
2011.05.18 14:49
근데 1박2일 호도협 트래킹이 없네...옥룡설산 인상리장 관람은???
-
고영호
2011.05.19 09:24
수교야!
정말 대단하구나!
중국역사의 규모가 정말 상상 이상이구나!
잘 지내고 좋은 사진과 글들 계속 부탁해요!
-
서동균
2011.05.19 12:37
중국여행은 지역마다 나름의 특징이 있다.
즉 북방의 북경지역 여행은 발로 걷는 여행이요
남방의 여행은 그 경치의 아름 다움을 보며 감탄사를 "아~~하고
눈으로 보는 여행이요
중부지방 (서안)을 여행하면 중국의 춘추전국시대+삼국지의 역사를 들으면서 하는 여행이라
귀로 듵는 여행이란다,
거기에 + 는 다양한 식재료가 많아서
발 + 입 / 눈 + 입 / 귀 + 입으로 여행한다라고도 한다네...ㅎㅎ
우리가 여행을 하다보면
몇 손님들은 가이드의 농사리가 맞는지 안맞는지,,,적어서 후에 확인 손님들도 계시더라...
즉 BC 몇년 잘못 말했다가는 후에 그가이드가 100년을 ~~~~ㅠㅠ...
서안가면 빠질수 없는 진씨 아저씨 애기....
귀팅으로 들었던 아저씨 애기...
진시황에 대하여 부치고 퍼오고 뚱쳐오고 해서 쪼메이 정리해둔거~~
시간 나시면 가벼이 읽어 보3....
★ 秦始皇(진시황) - 폭군인가, 영웅인가 ★
진시황제는 최초로 중국을 통일하는 과업을 이루었다는 점에서 중국역사상
독보적인 존재로 평가받는 인물이다. 그러나 그는 통일제국에 대한 지나친 집착으로 인해
폭군으로 부각되는 상반된 평가를 받고 있기도 하다.
중국이 전국 7웅에 의해 분열되어 서로 각축을 벌일 때는 기원전 259년에 태어났다.
성 懶(영). 이름 政(정). 趙(조)나라의 대상인 여불위의 공작으로 즉위한
장양왕의 아들로서 13세에 즉위하였다.
처음에는 태후의 신임을 받은 여불위와 노애가 권력을 농단하였으나
BC 238년 친정을 시작, 노애의 반란을 평정하고
여불위를 제거한 후, 울요와 이사 등을 등용하여 강력한 부국강병책을 추진하여
BC 230~BC 221년에 한․위․초․연․조․제 나라를 차례로 멸망시키고
천하통일의 위업을 달성하였다.
親政(친정)에 들어가 본격적인 영토 확장작업에 착수한 것은 23세 때였다.
놀랍게도 그의 통일사업은 기원전 230년부터 221년까지는 아주 짧은 기간에 이루어졌다.
기원전 8세기부터 분열된 중국이 하나의 통치체제 밑에서 역사를 전개하기
시작했던 것이다.통일의 대업을 달성한 그는
중앙집권적 전제정치체제를 수립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
우선 그는 황제라는 존호를 최초로 제정하고 二世(이세)나 三世(삼세)는 물론
萬世(만세)까지 계속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스스로 始皇帝(시황제)라 칭했다.
또한 전국을 하나의 통치체제로 편입시키기 위해 郡縣(군현)제도를 실시했다.
황제를 정점으로 西周(서주)(기원전 1122-1771)시대의 봉건체제를 대신하게 됐다.
이후 중국은 2천년 이상 군 현재를 운영하기에 이르렀다.
그의 不老長生(불로장생)에 대한 집착은 너무 잘 알려져 있다.
그는 자신의 목숨이 영원하기를 원하듯,
통일제국이 영구히 존속하도록 온갖 노력을 경주했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집념은 뜻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가 기원전 210년 50세의 나이로 사망한 후 얼마 못되어,
진 제국의 長壽(장수)도 그의 뜻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채 끝나고 말았다.
왜 진이 이렇듯 단명하고 말았는가 ? 우리선 통일과업을 완성시킨 진시황제가 사망한 후,
왕위계승을 둘러싼 혼란이 지속됐기 때문이다.
특히 그의 뒤를 이었던 泰二世(태이세)황제는 정통성 시비에 말려들기도 했다.
더욱이 중앙집권적 통일제국은 탄생했지만,
아직도 봉건제가 여전히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춘추전국시대의 오랜 세월을 거쳐 중국은 봉건적인 정치질서에서 중앙집권적인
체제로 전환해왔다. 또한 통일후 진은 전국시내에 서울 자웅을 겨루던 나머지
6국의 지배층 1만 호를 강제로 수도 咸陽(함양)으로 이주시켜,
제국이 분열되는 것을 방지하고자 노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봉건제는 완전히 소멸되지 않았다.
결국 진 제국 말기 지방 토호와 6국의 귀족세력이 전국각지에서 봉기하여
진 왕조를 전복시켰다.
진시황제부터 시작된 무리한 토목공사도 진의 단명을 설명하는 데 빼놓을 수 없다.
지금도 인공위성에서 욱안으로 관찰 할 수 있는 유일한 인공 구조물이라는
1만2천7백리의 만리장성, 사치의 상징으로 거명되는
길이 6백90m, 폭 1백14m의 아방궁,
무수한 호화유적을 남긴 진시황제 무덤(높이 약 70여m, 동서 약 6백m, 남북 2박여m),
그 외에도 무수한 건축물이 조성됐다.
당연히 이를 위해 과다한 세금을 징수하게 되어,
통일된 후에는 세부 담이 무려 20배로 늘었다고 백성들이 불평할 정도였다.
마지막으로 국토나 도량형, 문자 따위의 통일 뿐 아니라 사상의 통일까지 이루려고 했던
진은 결국 「통일작업」의 무리한 추진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단명을 초래했다.
焚書坑儒(분서갱유)애 말로 사상통제가 낳은 불행한 사건이었다.
모두 4백60여명의 선비를 생체로 매장하여 반대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지식인들을
단숨에 제거했다. 또한 진나라 외에 다른 나라의 역사를 다룬 역사서는 물론,
농업등 실용적인 목적을 지닌 책을 체외하고
거의 모두 책을 불사르는 문명파괴 행위도 서슴지 않았다.
이러한 행위는 지식분자,
특히 유학을 신봉하는 선비들의 강한 반발을 불러일으키는 직접적 원인이 됐다.
진시황제의 분서갱유는 중국은 물로 동양문화 전체에 너무나도 깊은 상처를 남겼다.
무엇보다도 국가권력에 의해 사상과 학문의 자유가 억업되는 최초의 선례가 됐던 셈이다.
이로 말미암아 동양인은 전통적으로 획일적인 사고에 길들여졌으며,
2천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중국인은 물론 동양인 전체가 다원화 사회를
실현시키기 위해 진통을 겪고 있다.
◈ 여불위 (呂不韋 ; ?~BC 235)
중국 전국시대 말기 진(秦)나라의 정치가로서 원래 양책(陽翟:河南)의 푸양[陽] 사람이다.
대상인(大商人)으로 조(趙)나라의 한단(余鄲)으로 갔을 때,
진나라의 서공자(庶公子)로 볼모로 잡혀 있는 자초(子楚)를 도왔다.
그의 도움으로 귀국한 자초는 왕위에 올라 장양왕(莊襄王)이 되었고,
그 공로에 의해 그는 승상(丞相)이 되어 문신후(文信侯)에 봉하여졌다.
장양왕이 죽은 뒤 《사기(史記)》에 여불위의 친자식이라고
기록된 태자 정(政:始皇帝)이 왕위에 올랐다.
최고의 상국(相國)이 되어 중부(仲父)라는 칭호로 불리며 중용되었으나,
태후(太后:진시황의 모후)의 밀통사건에 연루되어
상국에서 파면, 자신의 봉지인 허난으로 돌아갔다. 그 후 반란을 두려워한 황제가
그를 촉(蜀 : 지금의 쓰촨성[四川省]) 지방으로 쫓아버리려 하자
독약을 먹고 자살했다고 한다.
전국 말기의 귀중한 사료인 《여씨 춘추(呂氏春秋)》는
그가 3000명의 식객들을 시켜 편찬한 것이다.
이 책은 도가(道家)사상이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나, 유가(儒家) ․병가(兵家) ․
농가(農家) ․형명가(刑名家) 등의 설(說)도 볼 수 있다.
또한 춘추전국(春秋戰國)시대의 시사(時事)에 관한 것도 수록되어 있어
그 시대를 알 수 있는 중요한 사론서이다.
《여씨 춘추(呂氏春秋)》가 완성되자 여불위는 셴양[咸陽]의 시문(市門)에 걸어놓고,
이 책의 내용을 한 자라도 고칠 수 있는 사람이 있으면 천금을 주겠다고 하여
완벽한 내용을 과시하였다.
- 여불위와 부친과의 대화 -
"아버님, 농부가 농사를 지을 때 백 냥 가량의 자본을 투자했다면
그 소득은 얼마나 되겠습니까?"
부친은 어리둥절하였으나 즉시 대답했다.
원래가 어리석지 않은 아들의 질문이라 까닭이 있을 거라 생각하여 느낀 대로 대답했다.
"약 열 배 정도는 되지 않겠는가?"
"그럼 주옥(珠玉)을 사서 잘 보관하였다가 팔면 그 이익은 얼마나 되겠습니까?"
"아마 백 배는 될 것 같구나."
이 말을 듣자 여불위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띠며 넌지시 물었다.
"그럼 왕이 될 자를 도와주고 나중에 권력을 차지하면 그 이익은 얼마나 되겠습니까?"
엉뚱한 물음에 여불위의 부친은 뚫어지게 아들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대답했다.
"그거야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이익이 아니겠느냐?"
이와 같은 대답에 여불위는 밝은 표정을 지으며,
"사실 농사는 육체가 피로하고 장사는 마음이 피로한데다가
그 수입마저 고정되어 있습니다.
저는 방금 지난번 전쟁 때 생포된 황손(皇孫) 이 인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상(相)이 차후 천하에 으뜸가는 귀인이 되겠더군요."
☆ 진시황(秦始皇)
진시황은 여러 가지 의미에서 괴물(怪物)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만약 시황제가 천하를 통일하지 않았다면 중국은 현재의 유럽처럼 여러 나라로
나뉘어져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자연스럽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가 대륙을 통일하기 이전에는 중국(中國)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 이전의 역사 서에 나타나는 중국이라는 단어는 단지 '나라의 중앙' 또는
'수도'라는 뜻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의 대륙 통일 이후에야 비로소
'우리는 같은 나라의 사람'이라는 인식이 대륙의 사람들에게 생겨났다.
그로 인해 삼국(三國) 분립시대나 남북조((南北) 분열시대의 중국인들은
'이것은 이상사태(異常事態)다.
언젠가 하나로 통일되는 것이 본래의 모습이다' 라는 생각을 자연스럽게 가졌던 것이다.
창작으로 가공할 괴물이 아니었다면 이러한 대사업을 이룩하지 못했을 것이다.
◈ 처음으로 황제(皇帝)의 칭호를 쓰다
'황제' 라는 말은 영어로 emperor라고 한다.
emperor는 로마 제국의 황제 emperialt에서 유래된 말이나
'皇帝' 라는 두 개의 한자로 칭호를 최초로 쓴 사람은 진시황제(秦始皇帝)였다.
시황제의 시대,'전국칠웅(戰國七雄;중국 전국시대의 일곱 제후)' 이라고 해서
중국에는 일곱 개의 강국이 있었고, 진(秦)은 그 중의 한 나라였다.
시황제는 나머지 여섯 개 나라를 잇따라 멸망시켰는데 BC 221년에 최후까지 남아 있던
산동(山東) 반도의 제(齊)나라를 멸망시킴으로써 비로소 천하통일을 이룩하였다.
진시황은 태황의 태(泰)를 떼어내고 황(皇)만을 취하고 삼황오제(三皇五帝)의
오제(五帝)에서 제(帝)를 택해서 '황제'로 칭하기로 했던 것이다.
삼황오제(三皇五帝)란 중국 고대 전설에 나오는 것으로
삼황(三皇)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대체로 복희(伏羲)씨, 여와(女蝸)씨, 신농(神農)씨 세 사람의 지도자를 말한다.
이들은 백성들에게 여러 가지를 가르친 왕으로 전해진다.
오제(五帝)는 황제, 전욱, 곡, 요, 순이라는 다섯 사람의 성군을 가리킨다.
따라서 '황제'라는 말에는 진시황 자신이 3황 5제의 덕을 겸비한다는 뜻도
포함되어 있었다.
◈ 동문(同文)-문자의 통일
진시황은 여러 가지 새로운 제도를 제정했는데,
그 중에서도 누구의 생각에나 쉽게 떠오르는 것은
'동문(同文;문(文)을 같이 하는 것)' 즉 문자를 하나로 통일시킨 것이다.
전국시대의 7웅은 각 나라마다 글자의 형태가 달랐었다.
그 근본은 은(殷)나라의 갑골문자(甲骨文字)에서 나온 것이었지만
지역에 따라서 약간씩 자체(字體)가 달랐고 제각기 다른 문자가 있었던 것이다.
시황제는 진나라의 소전(小篆)이란 글자의 형태를 천하의 문자로 정하고,
나머지 문자들을 폐지시켰다. 그 폐지된 문자를 육국문자(六國文字)라고 부른다.
이 육국문자는 분서(焚書;죽간(竹簡)등의 책을 불태운 사건)으로 소멸되었다.
진시황제의 사후에 항우(項羽)가 함양(咸陽)으로 들어왔을 때 문서들을 버렸기 때문에
사료(史料)는 그다지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가끔 지하에서 특히 사막에서 출토되는 인장에서 이 육국문자를 찾아 볼 수가 있다.
인장이 돌로 만들어지게 된 것은 훨씬 뒤의 일이며, 그 당시는 모두 금속을 썼다.
훌륭한 사람은 금, 그 다음 사람은 은이나 구리를 썼다.
이것을 끈으로 매서 목에 걸었다. 전쟁시에는 이것이 인식표(認識票) 역할을 했다.
전사한 유체(遺體)를 판별할 수 없을 때에는 목에 걸었거나,
혹은 어딘가에 지니고 있는 금속의 인장에 의해서 그가 누구인가를 알 수 있었다.
이 인장에는 읽을 수 없는 문자들이 많이 있었는데 그것이 육국문자
즉 진시황제에 의해서 폐지되었던 문자였던 것이다.
같은 문자가 전국에서 통용된다는 것은 전국적으로 의사소통을 도모할 수 있다는 뜻이다.
단순히 국토통일 뿐만 아니라 실질적인 참된 뜻으로의 천하통일을 이루게 된 것이다.
◈ 동궤(同軌)-차륜(車輪) 폭의 통일
진시황의 통일정책으로 또 하나 유명한 것은 '동궤(同軌;궤(軌)를 같이 한다)'
즉 바퀴 폭의 통일이다.
당시 각국은 제각기 다른 나라의 수레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바퀴의 폭을 달리 하고 있었다.
수레는 대부분 전차(戰車)였다.
말이 끄는 전차는 도로에 깊은 바퀴자국을 만들고 그것이 레일같이 되어 있었다.
그 레일에 차륜을 넣어서 수레를 달리게 했던 것이다.
전차는 싸움을 위한 것이므로 타국의 전차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바퀴자국의
폭을 다르게 해 두면 적의 침입을 막는데 효과가 컸다.
그런데 이제는 천하가 통일된 것이다.
바퀴자국의 차이는 전국적인 교통의 흐름을 저해시킨다고 여긴 시황제는
전국에 '치도(馳道)'라는 도로를 만들고 차륜의 폭을 통일시켰다.
◈ 치도(馳道)의 건설
치도에 대해서는 진(秦)나라가 멸망하고 30년이 채 되지 않은 무렵
한(漢)나라의 문제(文帝) 시대의 가산(賈山)이란 사람이
글을 남겼다. 그것이 도폭은 50보(步)였다고 한다. '보(步)란 길이의 단위이며,
1보는 지금의 1.35m 정도이며, 50보의 폭이면 67m 정도이다.
그리고 3장(丈)마다(당시의 1장은 2.25m이며, 3장은 6~7m) 수목이 심어져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백성들이 동원되어 도로가 만들어지고,
그 도로가 비에 의해 유실되면 보수를 해야 했다.
그리고 백성들은 관리가 파견되어 오면 그 관리의 식량이나 주거의 뒷바라지도 해야 했다.
역(驛)에는 말을 비치하여 그 말을 사육하는 것도 모두 그 지역 백성들의 일이었다.
따라서 백성들의 고통이 대단했다고 한다.
한(漢)나라 때 다시 길을 만들자는 제안이 나왔으나 이것을 간(諫)한 사람이
가산(賈山)이다.
가산은 진나라의 시황제가 길을 개척했으니 다시 만들 필요가 없으며
진나라는 그 때문에 멸망한 것이라고 말했다.
시황제가 죽자 갑자기 나라가 멸망한 것은 도로 건설로 시달렸던 백성들의 원한이
컸기 때문이며, 한나라는 그것을 모방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진나라가 멸망한 지 30년이 지난 때였으므로
그 당시는 시황제가 만들었던 길이 남아 있었다. 치도는 정말 훌륭한 도로였다.
폭이 67m, 그리고 6m마다 큰 가로수가 심어져 있었을 뿐만 아니라
북쪽으로는 구원(九原), 만리장성 근처에서부터,
동쪽으로는 황해 연안까지, 남쪽은 양자강(揚子江)에 이르기까지 길이 뚫려 있었다.
그래서 어느 곳이든지 하나의 수레로 갈 수 있게 길이 연결되어 있었다.
진시황 이전에는 장쑤성(江蘇省)이나 절강성(浙江省)까지 가려면,
한(韓)나라에서 수레를 바꾸어 타고, 위(魏)나라에서도 바꾸어 타야만 했다.
그 외에도 곳곳에서 바꾸어 타야 했지만 진시황에 이르러서는
그러한 번거로움이 없어졌고 한 대의 수레로 전국 방방곡곡을 갈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도로로 인해 각지의 교역(交易)이 번창하게 되었고
산업경제가 활성화되는 데도 큰 힘이 되었다.
◈ 도량형(度量衡)의 통일
진시황은 도량형을 통일시켰다는 점도 아주 중요하다.
한 홉[合], 한 되[升], 한 말[斗]이라든가, 길이의 단위인 보(步), 장(丈) 등이
각국에서 약간씩 달랐다. 되나 말의 차이가 있었기 때문에 한 말이 어느 나라에서는
한 말에 미치지 못하는 경우가 생겼다.
그래서 전국의 도량형을 엄격히 통일시켰던 것이다.
이것은 천하를 통일했던 바로 그 해에 실시되었다.
한 홉이라는 표준 용기를 제작하여, 전국에 그것을 따르도록 명령했다.
중앙에서 보내온 한 홉짜리 용기가 동북 지방 근처에서 출토(出土)된 것으로 보아
사실상 전국에 배당되었던 사실을 반증하고 있다.이렇게 함으로써 산업과 경제가 발달했다.
이제까지는 각지에서 다시 하나하나 환산해야만 했던 것이 그러한 수고를 면하게 되었다.
화폐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진(秦)의 화폐가 전국에서 통용되었다.
◈ 절대자 시황제(始皇帝)
시황제는 현실주의자였다. 현실주의자가 아니었다면 천하통일 같은 것은 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누구나 신선을 믿고 있었다.
시황제도 믿고 있었다. 그는 천하를 통일하여 황제가 되었으며 '황제'라는 말
그 자체가 그가 처음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던 칭호였다.
또 그때까지 누구나 다 쓰고 있던
'짐(朕)'이라는 말을 황제 외에는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등 황제의 절대화를 도모했다.
황제의 절대화는 국가를 운영해 가는데 필요한 것이었지만 시황제는 스스로 절대적인
존재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천하통일의 대사업을 완수한 자신은 보통인간이 아니며
절대자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절대자란 구체적으로 말하면 불로 불사의 인간,
즉 신이나 선인과 같은 존재이다. 스스로를 절대자라고 자임했던 시황제는
이제 자기 자신이 선인(仙人)이 되겠다, 신선(神仙) 되겠다고 원하게 되었다.
신선이 되려면 어떻게 하면 좋은가.
시황제는 여러 사람에게 물어 보았는데 도사(당시는 방사(方士)라고 불렀다)가
여러 가지로 수상한 짓을 가르쳐 주었다.
예컨대 신선이 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에게 모습을 너무 보여 주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인주(人主)는 미행(微行) 하여 체중(體中)의 사기(邪氣)를 피(避)하라.'
사람을 만나면 그 사람의 사기(邪氣)가 몸에 들어와서 신기(神氣;몸 속에 있는 신의 기운)에
해가 된다고 해서 시황제에게 당분간 사람을 만나지 않도록 말했다.
더구나 자신이 있는 곳을 아무에게도 가르쳐 주지 않도록 하고 있었는데,
우연한 계기로 거처가 알려지고 말았다.
시황제는 매우 노하여 누가 알렸느냐고 조사했지만 알 수 없었다.
그러자 그 때 곁에 있던 자들을 모조리 죽였다고 한다.
그리고 <사기(史記)>에는 아니지만 다른 사료 등에 나와 있는 이야기에 의하면
금릉(金陵;지금의 남경)에 갔을 때 역시 방사(方士)였겠지만
'이 근방에는 왕의 기운이 감돌고 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왕기' 즉 왕의 기운이 감돌고 있다는 것은 그 지방에서 왕이 나온다는 것이다.
왕은 나 혼자면 충분하지 않는가.
그런데도 왕이 나온다는 것은 자기를 대신하는 자가 이 지방에서 나올 것 같다는 것이다.
그것은 이 지방의 기맥에 의한 것이므로 기맥을 단절해야겠다고
시황제는 산을 파서 무너뜨렸다.
'연강굴단(連岡掘斷;연속되어 있는 언덕을 잘라 버림)'해 버리면 왕기가 없어진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 장소는 진회(秦淮)라고 일컬어지며 지금도 남아 있다.
사람들 사이에서는 진나라 시대에 만들어진 수로라고 전해지고 있다.
지리학자의 관찰에 의하면 그것은 인공의 하천이 아니고 자연의 하천이라고도 하지만
이런 에피소드가 생긴 것은 역시 시황제의 인품에 의한 것이리라.
소주(蘇州)에 호구(虎丘)라는 산이 있는데 그곳에는 춘추시대 오(吳)나라 왕의
무덤이 있다. 오(吳)나라와 월(越)나라는 명검이 많이 나왔던 곳으로
왕이 사망하면 검을 무덤 속에 넣었다.
그런 명검이 몇 천 개나 있다고 들은 시황제가 그곳을 파헤치게 했다는 것이다.
파헤친 자리가 검지(劍池)라는 곳이다.
파 보았지만 범이 나타나서 그만 두었다는 이야기도 있고,
파헤치려 했던 곳에 범이 있어서 검으로 바위를 쳤던 그 자리가
지금도 남아 있다고 설명서에 쓰여 있기도 한다.
검을 차지하려 했던 것 역시 검이 갖는 영력이 탐이 나서 그랬을 것으로 생각된다.
◈ 분서갱유(焚書坑儒)
진(秦)나라는 상앙 변법 이래 법치 노선을 견지하지만 천하 통일 이후에도
이 정책은 변하지 않았는데,
시황(始皇) 34년(BC 213년) 유생이 진 제국의 철저한 군현제 강행을 반대하고
봉건제 부활을 주장함으로써 불행한 사태가 시작되었다.
시황제는 일단 그 의견을 조정의 공론에 붙였으나,
철저한 법가로 일관한 승상 이사(李斯)는 그에 반대하는 데 그치지 않고,
차제에 사적인 학문으로 정치를 비판하는 일체의 행동을 본원적으로 봉쇄하기 위하여
진기 이외의 사서는 모두 불태우고,
《시》《서》 백가어를 수장한 자는 30일 이내에 모두 관에 신고하여 불태우되
이를 어긴 자는 관노 성단(城旦)으로 삼으며,
감히 《시》 《서》를 논한 자는 기시(棄市)에 처하고,
옛것을 들먹이며 현실 정치를 비방한 자는 족형(族刑)에 처할 것,
단 의약 ․점복 ․농업 관계 서적은 제외할 것을 건의하자, 시황제는 이를 재가하였다.
이듬해(BC 212년) 불로장생약(不老長生藥)을 구하는데 실패한 방사(方士)들이 달아나자,
시황제는 함양(咸陽)에 있는 유생을 체포하여 결국 460여 명이 구덩이에 매장되는
형을 받았다. 이것이 역사상 악명 높은 시황제의 분서갱유인데,
처형 규모도 크지 않고 실제 유생이라기보다는 사기성이 농후한
일부 방사를 겨냥한 것이라는 점을 들어 유가(儒家) 탄압을 과장할 필요가 없다는
주장도 있다. 또 분서도 그 실제적인 효과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진 제국에서 유가(儒家)가 환영받지 못한 것은 명백하다._중략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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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동균
2011.05.19 12:58
발동 걸린 김에....중국 요리에 대하여~
퍼와서 꿍쳐 놓은거 펼침...
□ 중국 음식의 지리적 구분과 각지 유명 요리(名菜)
대략 구분에 의해 다음 4대 요리로 분류하고 있다..
▷ 남첨(南甛)남쪽 음식은 달고---광동(廣東)요리가 단 것이 많음
▷ 오채(奧菜): 광동 요리. 단맛이 많다. 특히 걸죽하게 만들어내는 음식이 많다.
「龍虎鬪」라는 뱀요리는 2천년 역사라고 하는데, 3종류의 독사와 담비를 재료로 만든다.
동물고기 요리 중에 가장 진귀한 것으로 여김.
▷ 북함(北鹹): 북쪽 요리는 좀 짜고--산동이나 북경 요리가 은근히 짬
▷ 노채(魯菜) : 산동 요리. 비교적 짠 편이지만 연하고 담백한 요리가 주종을 이룬다.
산동의 명승지 태산(泰山)의 심지(深池)란 곳의
명채(名菜)인 「干(乾)炸紅鱗魚」.
이 요리는 살아있는 붉은 잉어를 뜨거운 냄비에 넣고 튀기는 것이기 때문에
요리 완료후 황금색이 그대로 드러나마 맛 또한 연하기로 유명함.
▷ 동랄(東辣): 동쪽 요리는 맵고--사천(四川) 호남(湖南) 요리에 고추가 많이 들어감
▷ 천채(川菜) :사천 요리. 고추와 생강을 많이 넣어 매운 편이다.
「宮保鷄丁」등이 유명함. 그리고 두부 요리도 상당히 유명한데
「麻辣豆腐」를 대표로 본다. 한국인의 입맛에 비교적 접근한다.
▷서산(西酸): 서쪽 요리는 시다--산서(山西)지방 음식이 다소 시큼함
▷회양채(淮陽菜) 강소(江蘇) 및 절강(浙江) 요리: 주로 약한 불에 서서히 뜸을 들이거나
([火+悶]) 약한 불에 푹 삶는(火+畏) 요리가 많다.
조미료는 적게 사용하는 편이어서
담백한 맛을 즐길 수 있다. 「西湖醋魚」가 유명한데
서호에서 나오는 물고기를 시큼하게 요리한 것.
▷이밖에도 북경 요리 중 가장 유명한 北京[火+考]鴨:
북경에서 이 통오리구이로 가장 유명한 음식점은 '全聚德[火+考]鴨店'으로
약 100여년 역사를 가지고 있다고 하며,
이와 함께 옛날 궁중요리를 하는 음식점도 있는 바
북해(北海)의 '방선반장(倣膳飯莊)'과 이화원([臣+頁]和圓)의'청려관(聽麗館)'이다.
청나라 황제가 드셨다는 만한대찬(滿漢大餐)을 맛 보려면 돈다발 들고 가보세요^^
이외에도 양고기를 잘게 썰어 신선로에 데쳐 먹는
[水+刷]羊肉이란 요리도 겨울철에 유행함.
즉 우리가 주로 먹는 샤브샤브~~~^^
배 고프군,,,,^^
점심은 다들 하셨나,,,지금 시간이 1시 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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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는 운남의 호도협 트래킹을 계획했으나 8월에 송이버섯이 풍성하게 나온다는 말에
시안으로 돌리고 운남은 8월에 갈려고합니다. 관광, 트래킹과 송이 먹으러.......
혹시 관심있는 친구들 있으면 같이 갑시다. 송이구워 바이주랑......커~~~
곤명에 송이가 엄청 나옵니다. 라면에도 넣어 먹을정도로 싸고 많음......ㅋㅋㅋ
동균아 어떻노 한 번 잡아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