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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고 31회 동기회

경남고등학교 제31회 동기회

  

1. 아무도 몰래, 제자에게 건넨 편지

 

퇴계가 어느날, 공부를 마치고 가는 제자 이함형(李咸亨)의 소매를 잡았다. 그리고 편지 한 통을 건넸다. “아니, 지금 읽지 말고, 가능 도중에도 펴지 말고, 집 안에서도 읽지 말고...” 제자는 “그럼 언제 읽으라는 말씀인고...” 머리를 굴리고 있는데, 스승이 오금을 박았다.

 

“반드시, 집 싸립문 앞에서 읽게!”

 

안동에서 순천까지, 열흘, 궁금증을 누르고, 또 누르고, 마침내 집 앞에서 제자는 편지 봉투를 뜯었다. 서두는 이렇게 시작되고 있었다.

 

“천지가 있은 후에, 만물이 있고, 만물이 있은 후에 부부가 있다. 부부가 있은 후에 군신이 있고, 군신이 있은 후에 예의가 있다... 자사(子思)는 (<중용>에서 말하기를) '군자의 도는 부부에서 시작되어, 궁극에서 천리(天理)와 만난다...' 부부라는 ‘관계의 도’는 이처럼 중대한 것이니... ”

 

제자는 스승의 뜻을 짐작했다. 부부 사이가 안 좋다고 스승의 귀에까지 들어간 것이다.

 

“...이처럼 중대한 것인데, 어찌 마음이 맞지 않다고 소박을 줄 수 있으리오?”

 

“<대학>에 말하기를, ‘근본이 어지러운데, 말단을 다스린 자가 없으며, 두터운 관계를 소홀히 하고, 얇아도 좋을 곳을 후하게 해서는 안 된다’ 했느니...”

 

“슬프도다. 사람됨이 이미 각박하다면 어찌 부모를 섬길 것이며, 어찌 형제와 일가친척과 고을 사람과 잘 지낼 것이며, 어찌 임금을 섬기고 남들을 부릴 수 있으리오.”

 

“들으니 그대가 부부간에 화합하지 못한다고 하는데, 무슨 이유로 그러한 불행이 있는지 알지 못하겠네. 살펴 보건대 세상에는 이러한 불행을 겪는 사람들이 적지 않으니, 그 가운데에는 부인의 성품이 악덕해서 고치기 난감한 경우가 있고, 자색이 못난 경우, 지혜가 모자란 경우도 있고, 반대로, 남편이 방탕하고 취미가 별달라서 그렇게 되는 등 여러 경우가 있는 것이나, 그러나 대체로 성품이 악덕해서 고치기 어려운 경우를 제외하고는 모든 남편이 항상 반성하여 잘 대해줌으로써 부부의 도리를 잃지 아니하면, 가정이 파괴되고 자신이 더 말할 수 없는 각박한 인간으로 전락되는 지경에는 이르지 않는 법일쎄... 아내의 성품이 악덕하여 고치기 어렵다는 사람도 그 정도가 아주 심하지 아니하면, 또한 상황에 따라 잘 처리하여 마침내 서로 헤어지는 지경에는 이르지 않도록 해야지... 옛날에는 아내를 내쫓으면 다른 사람에게 시집을 갈 수 있었으므로, 칠거지악을 이유로 아내를 내쫒을 수도 있었으나 지금은 여자는 한번 시집가면 평생 한 남자를 따라야 하는데, 어찌 마음이 맞지 아니한다고, 길 가는 사람처럼, 또는 원수 보듯 하여 자기 아내를 허무하게 천리 밖으로 내쳐서 가정을 다스리는 도리를 망가트리고 자손을 끊기게 하는 불행을 저지를 수가 있겠는가...”

 

그러면서 퇴계는 정말 어려운 이야기를 꺼냈다. 자신의 부부 생활에 대한 것이었다.

 

“나는 일찍이 재혼하였으나 불행이 심하였네... 그래도 스스로 각박하게 대하지 아니하고 애써 잘 대하기를 수십년이나 했다네. 그 간에 더러는 마음이 뒤틀리고, 생각이 산란하여 고뇌를 견디기 어려운 적도 없지는 않았으나, 그렇다고 어찌 내 생각대로 인간의 근본도리를 소홀히 하여 홀로 계시는 어머니의 근심을 사게 하겠는가... 내 자네에게 충고하노니, 마땅히 거듭 깊이 생각하여 고치도록 힘쓰도록 하게. 이 점에 있어서 끝내 고치는 바가 없으면 굳이 학문을 해서 무엇을 할 것이며, 무엇을 실천한다 하겠는가?”

 

2. 권씨 부인을 맞다

 

퇴계의 재취 부인 권씨는 정신 박약이나 지체였다 한다. 아마도 집안의 잇달은 불행으로 그리되었을 것이다. 할아버지 권주는 연산군의 갑자사회때 귀양지 평해에서 사약을 받았고 할머니는 자진했다. 아버지 권질은 거제도의 ‘위리안치’ 시절 딸을 하나 낳았다.


집안의 화는 끝나지 않았다. 중종 때 조광조의 사림파가 피바람을 맞았다. 숙부 권전이 매를 맞고 현장에서 죽었고, 숙모는 관비로 끌려갔다. 아버지는 다시 예안으로 귀양을 가게 되었다. 딸은 아마도 거듭되는 충격에 정신을 반쯤 놓았던 것같다.

 

예안은 안동과 가깝다. 어느 날 권질이 퇴계를 불러, 어렵게 딸을 부탁했다. “상처한지 몇년되었을텐데, 속현(續絃)을 아니했다면서... 그래서 말인데, 보시다시피 내 딸이 이러네. 자네 아니고는 믿고 맡길 사람이 없네...”

 

퇴계는 “오래 침묵하다가...” “알겠습니다. 제가 맡도록 하겠습니다. 어머니께 아뢰어 승낙을 받고 곧 예를 갖추어 혼인을 치르겠습니다.” 권씨 부인을 맞아 양곡(暘谷)에 지산와사(芝山蝸舍)를 짓고 신접살림을 차렸다. 말 그대로 달팽이 껍질을 엎어놓은 듯 겨우 몸을 감출만한 작은 집이었다. 34세 봄부터는 벼슬을 얻어, 한양의 서소문 집에서 13년간을 같이 살았다.

 

3. 두 가지 일화가 전한다.

 

1) 퇴계가 상가에 조문을 가는데, 도포자락이 구멍이 났다. 아내에게 기워달라 하니, 빨간 헝겊을 덧대 기웠다.

 

예학(禮學)의 대가 아닌가. 사람들이 보고서 “흰 도포에는 빨간 헝겁을 대야 하는 것입니까?” (*역시 권위가 이 정도는 되어야 한다. 크크...) 퇴계는 말 없이 빙그레 웃었다고 한다.

 

2) 할아버지 제사상을 진설하는데 배가 하나 굴러 떨어졌다. 부인 권씨가 잽싸게 치마폭에 숨겼다. 큰 형수가 나무랬다. “과일이 떨어진 것은 정성이 부족한 탓인데, 치마에 감추면 어쩌자는 것인가?” 주변의 여인들이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었다.

 

밖이 소란스럽자 밖으로 나와 본 퇴계는 큰 형수에게 정중히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잘 타이르겠습니다. 그리고 손자며느리의 잘못이니, 돌아가신 할아버지께서도 귀엽게 보시고 화를 내시지는 않으실 것입니다. 부디 용서하여 주십시오.”

 

큰 형수는 입가에 미소를 띠면서 말했다고 한다. “참으로 동서는 행복한 사람이야. 서방님 같이 좋은 분을 만났으니...” 퇴계는 아내 권씨를 불러 치마 속에 배를 숨긴 이유를 물었다. 먹고 싶어 숨겼다고 하자 배를 꺼내, 손수 껍질을 깎아 아내에게 먹으라고 잘라주었다고 전해온다.

 

1546년 7월 2일. 권씨 부인이 죽자 한양의 서소문집에서 두 아들을 시켜 분상하게 했다. 아들들은 ‘계모’를 위해 상복을 입고, 시묘도 했다. 단양군수 퇴계는 죽령에서 부인의 영구를 맞았다. 지금 안동의 건지산 기슭의 앞산인 영지산(靈芝山)에 묘를 썼다. 지금도 산등성 하나 전체를 권씨 부인의 묘가 차지하고 있다. 

퇴계가 좋아하던 철쭉이 해마다 봄이면 산 일대를 온통 뒤집어 흡사 분홍치마를 두른 듯 붉은 꽃동산이 되는데, 퇴계는 산기슭에 여막을 지어 아들에게 시묘를 살게 하고, 자신은 건너편 바위 곁에 암자를 짓고 일년 넘게 권씨 부인의 무덤을 지켰다.

 

그 뿐인가. 자신에게 불민한 딸을 맡긴 장인에게도 극진히 대접했다. 적소에서 풀려난 권질은 경치 좋고 한적한 냇가에 초당 하나를 짓고 건강을 회복한다.

퇴계는 해마다 세배를 드리고, 회갑잔치를 지내주었다. 권질은 초당의 이름을 사위에게 부탁했다. 그는 사위가 건네준 ‘사락정(四樂亭)’을 자신의 아호(雅號)로 삼았다. 아들이 없어 대가 끊긴 장인을 위해 퇴계는 “큰 집에 뒤가 끊기므로 내가 이 돌에 적어 새기노니 영원토록 잘 전할지어다”라는 비문을 짓고 세웠다. 묘소에는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옛날 그땐 참 사람을 몰라보고

까닭 없이 저승으로 이분을 데려갔네

고향에 돌아와서 묘사를 지낸 후

매화 피는 모습을 보고 장인 생각하옵니다.

 

 

4. 퇴계를 위해 3년 상을

 

편지를 읽은 제자 이함형은 크게 깨달은 바가 있었다. 집으로 들어간 뒤부터 아내를 ‘손님처럼’ 대했고, 가정이 화목해졌다. 이함형의 부인은 퇴계가 죽자, 친부모가 돌아가신 것처럼, 3년 동안 상복을 입고 상례를 갖추었다...

 

지금도 퇴계의 가문에서는 다음과 같은 ‘규율’이 전해온다고 한다.

 

1) 부모에게 불효한 사람과는 대화를 나누지 말 것,

2) 처가에 향념(向念)이 없는 사람은 교제하지 말 것,

3) 아내를 쫒아낸 사람과는 사업을 같이 하지 말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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