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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고 31회 동기회

경남고등학교 제31회 동기회

퇴계의 그리운 임, 주자


                                  - 너에게도 님이 있느냐. 있다면 님이 아니라, 너의 그림자니라. (만해 한용운, <군말>) 

 

퇴계의 귀향에 대해 사람들은 정치의 환멸을 이유로 든다. 을사의 훈척들이 여전히 시퍼렇고, 기껏 올린 계책들이 반영되지 않자 그만 물러날 결심을 굳혔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자신들의 안목으로, 세속의 잣대로 퇴계를 판단한 것이 아닐까. 그는 장자(莊子)의 혐의를 무릅쓰고, 스스로를 ‘세상과 어긋지고 천상에 합하는’ 기인(畸人)으로 자임했다. 꿈에도 신선이 되고 싶어 했고, 당대와 어울리지 못해 ‘옛사람(古人)’들하고만 어울리고 싶어 산야(山野)를 고집했다. 지금도 가끔 그 후예들이 신문에 실린다. 안정된 직장, 화려한 캐리어를 뒤에 두고, 오랫동안 가슴에 품어왔던 꿈을 좇아 훌쩍 떠나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바로 그들이다.

 

1

물러난 퇴계는 한여름 푹푹 찌는 날씨에도 주자(朱子)를 읽고 있었다. 덥지 않으냐는 걱정에 “이 책을 읽으면 시원한 바람이 분다”고 했다. 그는 주자가 세운 목표를 가슴에 새기고 주자가 걸은 길을 따라 걸었다. ‘도산십이곡’의 일 절을 보라. “고인(古人)도 날 못 보고 나도 고인 못 뵈. 고인을 못 뵈도 가던 길 앞에 있네. 녀던 길 앞에 있거든 아니 녀고 어쩌리.” 그는 주자가 제시한 목표에 걸음이 미치지 못함을 늘 부끄럽게 여겼다.

 

특히 ‘주자의 편지들’이 평생의 반려였다. ‘언행록’에 의하면 “얼마나 읽었던지 자획이 거의 떨어져 나갔다”고 한다. “한번 죽 읽고 나면 장장(章章)이 융회(融會)하고 구구(句句)이 난숙(爛熟)하여 그 수용(受用)함이 손에 잡고 발로 밟는 듯, 귀로 듣고 눈으로 보는 듯하였다.” 퇴계는 공부의 방법뿐 아니라 일상의 언어와 행동, 물건을 주고받는 법, 벼슬에 나아가고 물러나는 도리에 이르기까지 ‘주자서(朱子書)’에 적힌 지침을 따라나갔다.

 

교훈만 따른 것이 아니다. 그가 만난 사람과 사건들, 일상적 대화, 그가 느낀 감회와 그리는 풍경들까지, 그야말로 숨소리와 기침소리 하나까지 놓치지 않고 음미했다. 그는 ‘훈계’만이 아니라 ‘서술’이 그대로 감화를 통해 인간을 심원하게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을 몸소 실증했다.

 

2

퇴계는 날마다 그리고 순간순간을 주자를 떠올리며 주자와 더불어 살았다. 그런 삶을 지금의 우리는 상상하기 어렵다. 그는 주자와 사대를 같이하고 지역을 함께하지 못함을 한탄했다. 그 안타까움이 그리움으로 이어졌으니, 그는 어느 날 꿈속에서 그를 만나는 감격을 누리기도 했다. 주자는 퇴계의 ‘아름다운 사람(美人)’이었다. ‘내 고운 한 임’이라고까지 적기도 했다. 여기 남녀 간 절절한 연애보다 더 짙은 연모가 배어 있다. 다시 ‘도산십이곡’의 일 절. “유란(幽蘭)이 재곡(在谷)하니 자연(自然)이 듣기 조해, 백설(白雪)이 재산(在山)하니 자연이 보디 됴해. 이중에 저 미일인(美一人)을 더욱 닛디 못하네.”

 

이 ‘미인’은 결코 임금이 아니다. 송강 정철의 ‘미인곡(美人曲)’과는 달리 퇴계는 임금에게 자신의 그리움을 드러낸 적이 없다. 같은 시기에 지은 ‘추회(秋懷)’ 11수 마지막 연에서도 퇴계는 “미인은 하늘가에 격해 있어도, 예부터 좋아함을 같이했다오”라고 읊었다. 여기 ‘동소호(同所好)’는 가치와 길을 같이한다는 뜻이다. 당연히 매화도 아니고 임금도 아니다. 고인(古人), 그 가운데 주자를 특칭하고 있다.

 

3.

퇴계의 이 연모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그는 ‘민족주의’와는 거리가 멀다. 대체 중국의 한 지식인을 어떻게 삶의 기준으로 삼을 수 있단 말인가. 정치적 책무를 저버리고 개인적 ‘도피’로 빠진 것도 뭣한데 이런 ‘사대주의’를 용납할 수 있을까.

그뿐인가. 퇴계는 지금 보듯 독창적 사유를 구축하기보다 오직 주자의 길을 ‘모방’하는 데 철저하고자 했다. 율곡의 지적은 정확하다 “화담은 자득(自得)이 강한데, 퇴계는 의양(依樣)의 맛이 많다.”

 

퇴계는 그러나 이 평가에 별로 화를 내지 않고 오히려 기뻐했을 것이다. 퇴계는 이른바 독창을 경계했다. 화담이 ‘귀신사생론(鬼神死生論)’을 지어, “이 글은 천성(千聖)이 전하지 못한 비밀을 담고 있으니, 적어, 동방에 학자가 있었다는 것을 알게 하라”고 자부하자, 그 자기현시욕과 ‘창발’의 성급에 혀를 끌끌 찼다.

 

유명한 일화가 있다. 어느 오(吳)씨 성을 가진 유생이 말끝마다 “나는 말이지…내가 생각하기엔…” 하자, 퇴계는 그에게 ‘오아(吳我)’라는 별칭을 붙여주었다. 그는 겸허히 학습에 철저할 것을, 성급하게 자기 목소리를 내지 않도록 제자들을 경계했다.

이 점에서 율곡과는 성향이 달랐다. 문체도 서로 다르다. 율곡이 독자적 이해를 기반으로 자신의 아이디어를 조직해 나가는 사람이라면, 퇴계는 수많은 전고를 펼쳐놓고, 가닥을 잡아주려고 애쓴다. 그래서 율곡의 글은 바로 번역하기 쉬운데, 퇴계의 글은 맥락을 밝히고, 내적 연관을 잡아주기 위해 층층의 해설과 주석이 필요하다.

 

4.

율곡은 “내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주자라도 틀렸다”고 외쳤다. 그럼 퇴계보다 율곡이 더 독창적인가. 아이로니컬하게도 사유의 골격에서 볼 때 주자의 원론에 가장 근접한 사람은 율곡이다. 퇴계는 그 의양(依樣)에도 불구하고 이발(理發)을 확신하면서 주자학의 ‘일탈’을 감행했다. 물론 자신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하버드 대학의 투 웨이밍이 갈파한 대로, “퇴계는 자신도 모르지만 주자학의 경계를 넘어섰다. 양명학과의 통합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그럼 누가 모방이고, 누가 독창인가. 독창을 표방했으되 결국 모방에 가깝고, 모방에 철저했으되 종당에는 자신의 문호를 만든 이 역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더 근본적으로 물어보자. 대체 모방은 저열하고 독창은 귀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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