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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고 31회 동기회

경남고등학교 제31회 동기회

행복하십니까?(2)

2011.09.21 15:19

박종규 조회 수: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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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류아닌 곳에 풍류가 있고
강호에는 고수가 많다고 하는데
불초소생이 친구들에게 “행복하십니까?”라고 물어본 순간
‘행복은 생각하기 나름“
“행 ․ 불행은 마음속에 있지 않는가”
“행복하십니까라고 물었으니 당신이 책임지시오” 등
고수님들에게 덜컥 걸리고 말았습니다.
自業自得이요, 自作自受인 것 인정합니다.
해서, 開口卽錯인줄 알면서도 변명 아닌 변명을 다시 올립니다.
 
지난번 “타자의 행복이 나의 행복이다”는 행복관은
사실 행복이라는 것이 어느 정도 실체가 있다는 가정에서
상대적으로, 방편적으로, 현실적으로 접근을 해보았습니다.
 
그러나 여러 고수님들 의견처럼 ‘행복이란 이것이다’고
내놓을 만한 것이 없다는 것에는 전적으로 동의를 하는 바입니다.
 
공 ․ 맹사상과 노 ․ 장사상을 대표하는 우리 동양의 정신세계에서는
우주 만물의 생성원리를 ‘태극도설’ 내지는 ‘음양오행설’로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태극(무극)에서 음과 양이 생겨났고, 다시 음과 양이 목화토금수의 오행으로 변하고,
오행이 사계절로 바뀌고 만물이 생겨났다고 설명합니다.
(자세한 내용은 한형조 박사의 <왜, 동양철학인가?>를 참고 하시기 바람)
 
그 중 음 ․ 양의 변화 과정만 살펴본다면
음이 극에 이르면 양으로 변하고
양이 극에 이르면 음으로 변한다(物極必反)
즉, 밤이 극에 이르면 낮으로 변하고
낮이 극에 이르면 밤으로 변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음과 양은 따로 독립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음속에는 본래부터 양이 들어있고, 양속에는 음이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태극기 중앙의 붉은색과 파란색이 
정중앙 직선이 아니고  물결모양으로 경계가 지어진 것을 생각하면 이해가 되겠지요
 
일전에 ‘인간사 새옹지마’란 글에서 소개한  
동양 고전 중의 하나인 淮南子(회남자)란 책에는
夫禍之來也, 人自生之; 福之來也, 人自成之. 禍與福同門
“대저 禍가 나에게 오는 것도 내가 스스로 그것을 생하게 한 것이요
福이 나에게 오는 것도 내가 스스로 그것을 이룬 것이다 
禍와 福이란 본시 한 門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禍與福同門)“ 
라는 말이 있습니다. 
 
 
禍와 福이 마치 같은 학교를 졸업한 것처럼 같은 문에서 나온 것이므로
禍卽福이요, 福卽禍라고 하고 있으니 쉽게 이해할 수는 없을 지 모르나,
禍속에는 반드시 나에게 불행을 가져오는 것만 있는 것이 아니고
장차 福이 될 만한 여지도 잉태되어 있다는 것이고,
福속에서도 반드시 나에게 행복을 가져 오는 것만 있는 것이 아니고
언젠가는 그 福 때문에 禍를 자초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이해가 될 수가 있겠지요.
 
회남자는 다시 뒤 어어
故福之爲禍 禍之爲福, 化不可極, 深不可測也
“그러므로 복이 화가 되고 또 화가 복이 되는 것은, 그 변화가 불측하여
그 끝을 알 수가 없고, 그 이치가 깊고 깊어 이루다 헤아릴 수 없다“고 하면서
동양의 음양사상을 설파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회남자에서 본,  행 ․ 불행을 정리하자면
행 ․ 불행은 自作自受이나 그 변화는 알 수가 없다.는 결론에 이릅니다.
 
한편, 불교의 경전 중 하나인 <화엄경>에서는
“우리의 마음은 그림을 그리는 화가와 같아서 무엇이든지 마음대로 그려낼 수가 있다”
그러므로 행복하다, 불행하다는 생각(法)은 인연따라 생하는 경계에 대하여
내가 스스로 행 ․ 불행의 이름을 붙였을 뿐 그 실체는 있지 않다고 설명합니다.
한마디로, 一心不生 萬法無垢(한 생각을 일으키지 않으면 만법에 잘못이 없다)입니다.
 
불교는 ‘부처’가 되는 공부입니다만 아이러니 하게도
가장 배격하는 말이 또한 ‘부처’입니다.
우리의 본성인 참나(부처)는 한 생각도 일으키지 않은 그 자리 無念無心한 자리인데,
“부처가 무엇입니까?”하고 묻는 순간에 한 생각을 일으켰기 때문에
부처와 십만팔천리나 멀어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황벽선사는 “불법의 대의가 무엇입니까?”라고 묻는 제자 임제에게
방편으로 방망이로 혹독하게 때리기도 하였던 것입니다.
 
우리의 본성인 참나는 비유하자면
‘영원히 마르지 않는 옹달샘’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떠 마셔도 마르지 않는 것처럼
우리는 살아오면서 무수한 생각을 지어내었지만 
또 다시 떠오르는 생각의 한계를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은 그 끝을 알 수가 없는 허공과도 같다고 합니다.
 
또한 우리의 마음은 착한 생각이든, 악한 생각이든 어떠한 생각도 일으킬 수가 있습니다.
6조 혜능선사는 5조 홍인대사로부터 전해 받은 가사와 발우를 뺏어려고 뒤따라온
혜명에게 “선도 생각하지 말고, 악도 생각하지 않을 때 너의 본래면목이 무엇이냐?”
고 첫 법문을 하였고, 황벽선사는 “악한 마음도 부처님 마음이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행 ․ 불행이라는 것은 우리의 본래자리, 한 생각을 일으키기 전인
참나자리에서 보면 한 생각을 일으킨 것에 불과 하고 그 실체가 있다고 할 수 없겠지요.
 
그러나 현실의 우리의 삶속에는 몸을 가지고 있기에
행 ․ 불행을 느끼지 아니하고 살 수는 없으므로
행 ․ 불행이 없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면 불교의 가르침에 따른다고 하더라도 현실적으로 어떠한 자세를 가지고
살아야만 하는가?라는 의문이 남습니다.
 
그 해답은 “中道”에 있습니다.
幸에도 치우치지 아니하고
不幸에도 치우지지 아니하는 태도,
 
즉, 오는 것은 오게 하고
머무는 것은 머물게 하고
가는 것은 가게 하는 자세,
 
幸과 不幸의 느낌이 들때마다
스스로 한 생각을 일으켰다는 알아차림 속에
幸 ․ 不幸을 뛰어넘는 중도의 자세가 필요하다고 할 것입니다.
 
앞으로 저가 친구들에게 “행복하십니까?”하고 글이 아니라
면전에서 말로 물어본다면,
그에 대한 응답으로 저의 빰을 때리더라도 감수하겠습니다.ㅋㅋ
 
그래도 마지막으로 또 묻고 싶습니다
“행복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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